지하 산책

사랑/일상 2018.07.09 15:25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소공동 지하를 걷는다. 회사 앞 지하상가로 들어가면 시청역, 을지로입구를 거쳐 동대문까지 갈 수 있는 지하 산책로가 있다. 신 대법관님이 소개해 준 산책길이니, 대법관 루트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보았다. 대법관 루트를 걷다보면 적당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더운 구간과 시원한 구간이 있으며, 길이 넓어지기도 좁아지기도 하고, 시선을 끄는 구경거리도 있다. 계속 걷다보면 심지어 오솔오솔 바람이 부는 듯한 착각도 든다.

어제도 문 닫힌 지하 상점가를 잠시 걸었다. 정처없이 걷다보면 흘러간 대화를 곱씹게 된다. 사이비 교주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광신도의 자질을 타고난 것 아닐까. 무엇에든 뛰어들어 맹신할 준비가 되어있었으나 결국 그럴싸한 교주를 만나지 못한 삶. 실패한 광신도에게는 허무한 시간뿐이다. 세속주의, 합리주의, 무신론를 자주 입에 올리지만, 내심 누구보다 신비주의에 강렬하게 끌린다는 사실은 말하지 못할 비밀이다.

언젠가 그 사람과 즐겨가던 공원의 벤치에 가만히 앉아보았다. 그리운 마음이 파도소리처럼 밀려왔다. 의지할 신 하나 없는 내가 무언가를 믿는 일에 가장 가까운 마음을 가졌던 것은 그 사람이었다. 신을 갖지 못하는 나약한 정신에 비춘 한 줄기의 빛. 그러니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은 얼마간은 영적인 고양감이나 경외감에 가까웠다. 하얀 어둠을 걷는 동안은 허무할 겨를이 없다. 그 위태롭고 아슬아슬하던 날들이 돌이켜보면 가장 은혜로웠다.

해를 보지 못하고 걸으니 지루한 생각뿐이다. 지하산책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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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하는 생각

사랑 2018.06.10 01:47
요 며칠 강박적으로 책을 읽는다. 거의 소설이지만 에세이랑 시도 좀 읽고 있다. 어쨌든 비문학은 거의 없다. 오늘은 백수린의 데뷔 소설집,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 권여선 신작 에세이를 읽었다. 뭐라도 읽고 있지 않으면 자꾸 자라나는 망상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열심히 눌러담는다. 그러니 오늘도 잠을 못이루는 것은 순전히 그 날의 밤산책 때문이다.

백수린님은 성실한 작가인 것 같다. 신비로운 재능을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소설은 많지 않지만, 게으른 소설도 거의 쓰지 않는다. 노동하는 자의 세속적 성실함으로 꾸준히 좋은 소설을 펴내는 성실한 사람의 느낌. 자기복제와 반복은 단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두 권의 단편집을 읽으면서도 거슬리는 소설이 한 편도 없다는 건 놀라울 정도의 QC이다.

버닝을 보고 헛간을 태우다를 읽었다. 하루키는 하루키고 이창동은 이창동이다. 시나리오는 거의 새로 쓴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버닝이 표현하려는 날선 감정들은 하루키 원작과는 무관하다. 오직 스티븐 연의 서늘한 섬뜩함만이 하루키로부터 차용한 것인데, 그 연출은 오히려 너무 친절해서 아쉬웠던 부분. 영화와 단편소설의 어쩔 수 없는 차이겠지만, 결과적으로 버닝은 이창동의 독창적 산물인 셈이다. (사실 내가 내심 가장 흥분한 부분은 불타는 하우스의 비주얼었다. 미래의 방화범의 각성을 부추기는 영화이다.)

F진영의 비판은 결국 이해할 수 없었다. 여주는 굉장히 매력적인 주체로 묘사되었고, 남주의 각성을 위해 허무하게 소비되었다는 주장도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가 무의미하기 소비되었지) 이창동이 오아시스부터 욕을 좀 먹은 건 사실이고, 유아인에 대한 반감 얘기도 들었지만, 좀 억지스럽다. 오히려 하루키의 원작이야말로 진짜 미소지니적 묘사를 담고 있는데, 이창동이 바꾼 부분은 매우 전향적인 것이다.

그리고 권여선 에세이. 나는 역시 권작가님을 사랑한다. 찬장이 모셔둔 글렌피딕 까서  혼자 홀짝홀짝 마시면서 읽었다. 무턱대고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그리고 오늘은, 자라나는 망상을 멈추려고 오랜만에 시를 읽었다. 완전히 실패했다. 나는 너무 예민하고 자기중심적이다. 너의 모든 시그널이 나를 향한 것으로 들린다. 그러다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젖은 베개를 털어 말리고 눅눅한 옷가지에 볼을 부비다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쓰다 만 편지를 세탁기에 넣고는 며칠을 묵혔다

내일은 아주 긴 산책을 할 것이다. 나의 이 터무니없는 생각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한발한발 천천히 곱씹어볼 것이다. 너의 아름다움이 잔뜩 묻은 머리를 이고 나가서, 툴툴 털어 말리고 올 것이다. 영화 한 편 끝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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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사랑 2018.06.06 01:45

명동성당이 네오고딕인지, 고딕 리바이벌인지는 사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플라잉 버트리스가 있는지, 아니면 흔적만 남았는지도 아무 상관 없지. 중요한 건 그게 말이 되느냐야. 말이 된다는 감각.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런 감각을 기다려 왔다는 생각이 들어. 어둑해진 하늘과, 은은하던 조명과, 선선하던 바람과, 나른했던 목소리와, 가볍게 스치던 피부의 예리한 감각 같은 것들 전부 다 좋았지. 그 날의 네가 자주 생각날 거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말이 된다는 감각, 그 감각에 모든 걸 걸어도 좋겠다는 마음이었어.

이야기를 좋아해. 그럴듯한 이야기에 대한 갈망으로 소설과 영화를 찾아다녔던 것 같아. 서사에 약한 타입. 음악을 들을 때도 가사에, 회화를 볼 때조차 알레고리에 탐닉하는 타입. 그러니까, 나는 이야기가 말이 되는 사람을 찾아 떠돌고 있는 셈이야. 너와 느린 걸음으로 대화를 나누면서도, 속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상상해 봤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너와의 쓸쓸하지만 그럴듯했을 이야기를 말이야.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여행길에서 돌아와 아직도 추억에 흠뻑 젖어있는 너에게서.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일. 손쉽게 흘러가버리도 말았을 순간을, 나는, 우리는 언제쯤 캐치할 수 있을까? 지금이 그 순간인지 도무지 알아챌 방도가 없는데도.

그래도 나는 이 망상이 꽤나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런 이상할 정도로 근거 없는 확신이 들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상한 그대로의 말이 나올 때마다 깊은 곳의 무언가가 사그러드는 기분이었지만, 때로는 땅으로 꺼지거나 점으로 쪼그라드는 감각이었지만, 생각만큼 구슬프지 않고 오히려 생의 가장자리가 넓어지는 것 같았어. 말이 되는 이야기를 만난다는 건 그만큼 희소하고도 고귀한 경험이니까. 유예된 행복감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기분이었으니까. 금방이라도 타올라 없어질 양초처럼.

어때, 나름대로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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