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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드레스>, <탐욕의 제국>

“6개월 혹은 1~2년 후에 그때의 고문 가해자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행한 고문행위에 대해 전부 부정했다. 판사들은 고문 피해자들을 증인으로 법정에 불러세웠지만 그들의 혈류라든지 부러진 뼈, 데인 피부는 보려 하지 않고 오직 그들이 긴장해서 말을 더듬고 떠는 모습에만 주목했다. 그리고 보안경찰들이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들이 판사와 그 가족들을 테러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반론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주장을 수용했다. 그토록 엄혹한 시절에도 판사들 가운데는 법관으로서의 독립성을 지키고 사법적 양심을 보여준 명예로운 판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 알비 삭스, <블루 드레스> p. 40

면접순서를 기다리면서 <블루 드레스>를 읽었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다 보안요원의 폭탄테러로 한 눈과 팔은 인권변호사. 이후 넬슨 만델라 대통령에 의해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되어 분열된 조국의 화해를 위한 명판결들을 내린 법관. 화해를 위해서는 진상규명이 최우선이라는 대전제 아래 자신을 공격했던 보안요원마저 사면해준 알비 삭스의 회고록이다.

가볍게 읽으며 긴장을 풀겠다는 의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면접장이라는 사실도 잊을 정도로 책에 몰입했으니까. 그가 인종차별철폐를 위해 조국에서 추방당하고, 팔과 눈을 잃고, 기약 없는 고문을 당하고, 준 내전의 상황에서도 고문과 보복적 테러라는 악순환에 빠지지 않도록 조직원들을 독려하는 이야기를 읽고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은 나의 관대한 복수soft vengeance였다.” 나는 거의 울먹거렸다. 대기실에서 면접을 함께 기다리는 50명이 없었다면, 잠시 책을 덮고 엉엉 울었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에 과몰입한 나는 결국 면접관 앞에서 문제와는 관계 없이 방금 읽은 내용을 두서 없이 떠들어대고 말았다. 10분이 끝나 면접실을 나와 문을 닫는 소리에, 면접관의 뺨을 때린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합격하더라도 알비 삭스같은 법관은 절대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한 나의 프로이트적 말실수였는지도 모른다.

오늘, 인문대 학술제에서 다큐멘터리 <탐욕의 제국>을 보면서 <블루 드레스>의 구절을 떠올렸다. 어눌한 말투와 위축된 목소리로 증언했을 고문 피해자. 확신에 찬 뻔뻔한 목소리로 범죄를 부인했을 고문 가해자. 그리고 더듬거리는 피해자의 증언을 답답해하며 가해자에게 호감을 느꼈을 미친 판사. 그 삼자의 관계를 생각했다. <탐욕의 제국>에 등장하는 피해자들이 왜 더 설득력 있게 문제제기하지 못하는지, 왜 더 ‘세련된’ 방식으로 투쟁하지 못하는지 답답해하는 내 미친 자의식같은 그 판사들을 생각했다.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리고 절박한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그저 막연한 불쾌함을 핑계로 눈을 돌리려는, 마치 지금의 나와 같았을 그 판사들 말이다.

나는 어디까지 더 타협하게 될까. 얼마나 더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갈까. 대법원까지 갈지, 삼성에서 회유해 온다면 어떻게 협상에 임할지 논의하는 장면에서, “이 바보들아, 이제 그만 좀 해요. 그깢 인정이 대수야, 사과가 대수야. 적당히 보상 받으면 됐잖아, 좀 이제 그만 사람처럼 살면 안될까”라고 소리치고 싶어하는 나를 보면서 내가 온 길을 돌아본다. ‘운동의 힘을 믿는다’는 말을 그토록 대책없고 순진한 소리로 치부하게 된 나를 돌이켜본다. 클린룸에 울려퍼지는 기계소리, 입 없는 이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운 가슴 먹먹한 무소음들이 상영실을 울려퍼지는 동안, 나는 점점 더 스크린에서 멀어져 나에게로 침잠해 갔다. 같은 합창반에서 만났다며 “내가 좀 눈에 띄지”라고 웃는 대목에서는 나도 오랜만에 웃었다. 그러나 곧이은 훨씬 더 우울한 침묵. 화가 났다. (무엇에?) 잦은 음소거가 두려웠다.

졸업식장을 떠나는 이들에게 미안했다. 미안하기만 했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찾아보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그러한 방법이 옳다는, 유효하다는, 최선이라는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무기력했다. (이 글은, 그러니까, 오늘의 무기력에 대한 면죄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