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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하>를 위하여



프란시스 하 (2014)

Frances Ha 
8.6
감독
노아 바움바흐
출연
그레타 거윅, 아담 드라이버, 미키 섬너, 그레이스 검머, 마이클 제겐
정보
로맨스/멜로 | 미국 | 86 분 | 2014-07-17
글쓴이 평점  


“내일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그대는 아닐지도.

어쩌면 또 다른 품과 새로운 관계와 언제나의 아픔일지도... 

<Vad är i morgon? - Edith Södergran>



프란시스를 위하여_


  처음 자취를 시작한 것은 17살이 된 해 겨울이었다. 학업에 집중한다는 핑계로, 아늑한 집을 놔두고 혼자 방을 얻어 살겠다는 갑작스런 선언을 해버렸다. 흡사 고시공부를 위해 절에 들어가려는 사람과도 같은 비장한 선언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저 마음대로 살고 싶었을 뿐이지만, 부모님은 의외로 흔쾌히 동의해주셨다. 부모님 앞에서 십여년간 진지하고 생각 깊은 아이로 위장해 온 지난 노력의 결실이었다. 더이상 학생이 아니니 성인 아니겠냐는 자의식 과잉도 한몫 한 것 같다. 어쨌든 17세의 자취선언은 더이상 부모님의 통제를 받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삶의 시작이었다. (그 모든 ‘자율적인’ 생활의 비용충당을 부모님에게 의존했다는 ‘사소한’ 흠을 제외하면 그랬다는 말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6개의 방을 겪었다. 10년가량 혼자 살았으니, 방당 평균 2년이 채 안된다. 그 가운데에는 군복무기간도 있으니, 어림잡아 1년 6개월마다 한 번씩 이사를 다닌 셈이다. 나의 생활이란 언제나 변덕스럽게 요동치는 것이었다. 그러니 한 곳에 진득하게 살아지는 법이 없었다. 방을 옮기는 행위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과도 같았다. 악기를 조율하듯, 새로운 공간에 내 삶을 맞추는 일은 조심스럽고 세심한 노력을 필요로 했다. 당연하게도 언제나 불안정한 삶이었다. 그렇게 부유하듯 살다보면 당연히 내일에 전전긍긍하게 된다. 먼 미래에 대한 탄탄한 계획? 그런 것은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어쨌든 돌아갈 자기 집이 있는 사람들이나 부릴 수 있는 사치이다. 내년에, 내후년에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모른다면, 10년 뒤, 20년 뒤를 상상하는 일은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어쩌면, 청춘의 불안정함이란 ‘거소없음’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단단히 뿌리내릴 공간이 없으니 청춘은 불안하게 표류하는 수밖에 없다. 스펙, 진로, 아르바이트, 졸업같은 청춘의 어휘는 오히려 부차적이고 표피적인 설명일 뿐이다. 돌아갈 곳이 있는 자와 없는 자에게 청춘의 어휘가 갖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스무살의 내가 김애란의 단편소설을 몹시 좋아했던 것도, 청춘의 ‘거소없음’을 예리하게도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학 입학으로 처음 상경해 나와 같은 표류의 길에 들어서는 후배들에게 내심 강렬한 동지애와 애착을 느끼고는 김애란 단편집을 무턱대고 선물하곤 했다.


  누벨바그 풍의 <프란시스 하>를 보면서 떠오른 것도 바로 이 ‘거소없음’의 불안함이었다. 영화는 거의 모든 시선을 어리버리하고 불완전한 주인공 프란시스에게 맞춘다. 그리고 프란시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그의 오랜 친구 소피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영화의 초점은 프란시스와 소피의 정의하기 어려운 애매한 관계에 맞춰진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프란시스와 소피의 관계는 절반일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프란시스와 그의 거소와의 관계이다. 아니 오히려 프란시스와 거소의 관계가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축이 된다. 소피, 벤지, 레브, 레이첼 등 프란시스의 삶을 뒤흔드는 듯이 보이는 주변인들과의 관계는 실은 프란시스의 거소와 관련되면서만 문제될 뿐이다. 이 영화가 프란시스의 거소에 대해 말하고 있음은 동거의 거절이 이별로 이어지는 도입부터 드러난다. 영화의 각 장을 구분하는 소제목 역시 모두 프란시스의 주소이다. 심지어 이 영화의 제목조차 불완전하게나마 자신의 문패를 갖게 된 프란시스의 삶을 지칭한다. 요컨대 영화는 정당하게도 프란시스의 불안정한 청춘을 집을 통해 형상화한다.


  그러니 이 영화의 결말은 의미심장한 낙관론인 셈이다. 제대로 펼치지도 못한 이름표나마 문패로 갖게 될 모든 프란시스에게 바치는 청춘의 찬가인 셈이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그러나 편히 누울 곳 하나 없는 도시를 천방지축 뛰어다니고 있을 아픈 젊음에 바치는 처방전인 셈이다. 초라한 청춘이라도, 우리의 내일을 기대해보도록 하자. 포츈쿠키를 펼치는 마음으로, 아직 한번도 펴보지 못한 생을 충실히 읽어내려가도록 하자. 언젠가는 당당하게 내 이름이 걸린 주소 하나쯤 마련할 수 있을지 모르니.


  그러나 나는 영화가 끝나자 슬퍼졌다. 영화의 내용을 곱씹을수록 더욱 슬픔은 깊어졌다. 이제는 전처럼 청춘을 무턱대고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하는 법조차 모른 채 사랑하던 시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 나는 청춘을 낭만의 언어로 포장하는 일에 지쳤기 때문이다. 삶은, 그리고 사랑은, 포츈쿠기를 읽는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음을 알아채버린 나이가 되었다. 늙은 척 꼰대질을 시작하려는 것이 아니다. 무기력한 현실에 분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이제는 내가 그런 아둔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플 뿐이다. 그러니 청춘의 범위에 관한 이견은 차라리 부차적이다.


  뉴욕에, 서울에, 그 어느 대도시에서나 표류하고 있을 모든 프란시스를 위하여, 오늘밤은 맥주를 마신다. 자취를 처음 시작했던 그 해 겨울. 어른이 된 기념으로 방에서 혼자 맥주를 홀짝이던 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