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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계절>

  봄이다. 봄이 왔다. 용산에 벚꽃이 만발이다. 마시는 공기 속에 얼마간의 꽃내음이 섞인 듯한 기분이다. 요즘엔 계절의 변화를 예민하게 의식하게 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또 한 번의 ‘모든 계절’이 지나갔을 뿐이지만, 그 감상은 내 유년시절과는 전혀 다르다. 어린 나에게 계절이란 이를테면 감정의 뒷 배경 같은 것이었다. 나는 변화하는 계절 앞에서 기쁘거나, 외롭거나, 때때로 설레었지만, 그 것은 계절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나는 성가시고 귀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에는 모든 것이 계절이다. 공기도, 소리도, 풍경도, 사람도, 모든 것이 사계를 따라 떠나가고 돌아온다. 계절을 예민하게 의식하는 것.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철이 든다고 표현한다.
 

  나는 예민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무신경한 편이라고 할까. 그런 내 무신경함이 징그러워서 과장된 예민함을 흉내 내고는 했다. 감상적인 척, 세심한 척 짐짓 작위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그래도 얼마간의 자구적 노력과 주위 사람들의 정성으로 이제는 사람다운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주위를 살피고, 뒤를 돌아보는 습관을 들여가고 있다. 계절을 의식하고 감정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가면서 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행복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불행을 한탄하지도 말자. 삶의 진실이란 형이상학적 장광설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목적론적 메시아주의에서 찾을 것도 아니다. 온갖 이데올로기적 현혹이 난무하는 세상에 뻔뻔한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내가 마이크 리의 영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삶의 진실을 진정성있게 표현하려는 몇 안되는 소중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불행, 외로움, 질투, 박탈감 같은 것들을 삶의 예외라기보다는 본질이다. 애써 외면한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리얼리즘은 대단한 곳에 있지 않다. 삶의 진실을 직시하려는 용기, 이를 신파적으로 과장하거나 싸구려 동정을 베풀어 모욕하지 않고, 약간의 씁쓸한 웃음으로 공감하는 것. 그 것이 마이크 리의 리얼리즘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진부한 비유로써가 아니라 자연적 진리로써. 다시 온 봄이라고 해서 우리가 기대했던 스피노자적 ‘기쁜 정념들’과 베토벤의 ‘환희의 찬가’가 울려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봄에도 삶은 여전히 불안과 초조로 가득 차 있고, 우리는 단 한 번 만나지도 못할 것이며, 사람들은 추위와 외로움에 떨 지 모른다. 그러나 알 선생님 말마따나 세잔느는 무엇 때문에 생트-빅투아르 산을 매 순간 그렸겠는가. 그렇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봄이 온다면 우리는 봄을 기다려볼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