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하는 생각

사랑 2018.06.10 01:47
요 며칠 강박적으로 책을 읽는다. 거의 소설이지만 에세이랑 시도 좀 읽고 있다. 어쨌든 비문학은 거의 없다. 오늘은 백수린의 데뷔 소설집,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 권여선 신작 에세이를 읽었다. 뭐라도 읽고 있지 않으면 자꾸 자라나는 망상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열심히 눌러담는다. 그러니 오늘도 잠을 못이루는 것은 순전히 그 날의 밤산책 때문이다.

백수린님은 성실한 작가인 것 같다. 신비로운 재능을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소설은 많지 않지만, 게으른 소설도 거의 쓰지 않는다. 노동하는 자의 세속적 성실함으로 꾸준히 좋은 소설을 펴내는 성실한 사람의 느낌. 자기복제와 반복은 단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두 권의 단편집을 읽으면서도 거슬리는 소설이 한 편도 없다는 건 놀라울 정도의 QC이다.

버닝을 보고 헛간을 태우다를 읽었다. 하루키는 하루키고 이창동은 이창동이다. 시나리오는 거의 새로 쓴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버닝이 표현하려는 날선 감정들은 하루키 원작과는 무관하다. 오직 스티븐 연의 서늘한 섬뜩함만이 하루키로부터 차용한 것인데, 그 연출은 오히려 너무 친절해서 아쉬웠던 부분. 영화와 단편소설의 어쩔 수 없는 차이겠지만, 결과적으로 버닝은 이창동의 독창적 산물인 셈이다. (사실 내가 내심 가장 흥분한 부분은 불타는 하우스의 비주얼었다. 미래의 방화범의 각성을 부추기는 영화이다.)

F진영의 비판은 결국 이해할 수 없었다. 여주는 굉장히 매력적인 주체로 묘사되었고, 남주의 각성을 위해 허무하게 소비되었다는 주장도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가 무의미하기 소비되었지) 이창동이 오아시스부터 욕을 좀 먹은 건 사실이고, 유아인에 대한 반감 얘기도 들었지만, 좀 억지스럽다. 오히려 하루키의 원작이야말로 진짜 미소지니적 묘사를 담고 있는데, 이창동이 바꾼 부분은 매우 전향적인 것이다.

그리고 권여선 에세이. 나는 역시 권작가님을 사랑한다. 찬장이 모셔둔 글렌피딕 까서  혼자 홀짝홀짝 마시면서 읽었다. 무턱대고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그리고 오늘은, 자라나는 망상을 멈추려고 오랜만에 시를 읽었다. 완전히 실패했다. 나는 너무 예민하고 자기중심적이다. 너의 모든 시그널이 나를 향한 것으로 들린다. 그러다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젖은 베개를 털어 말리고 눅눅한 옷가지에 볼을 부비다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쓰다 만 편지를 세탁기에 넣고는 며칠을 묵혔다

내일은 아주 긴 산책을 할 것이다. 나의 이 터무니없는 생각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한발한발 천천히 곱씹어볼 것이다. 너의 아름다움이 잔뜩 묻은 머리를 이고 나가서, 툴툴 털어 말리고 올 것이다. 영화 한 편 끝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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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사랑 2018.06.06 01:45

명동성당이 네오고딕인지, 고딕 리바이벌인지는 사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플라잉 버트리스가 있는지, 아니면 흔적만 남았는지도 아무 상관 없지. 중요한 건 그게 말이 되느냐야. 말이 된다는 감각.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런 감각을 기다려 왔다는 생각이 들어. 어둑해진 하늘과, 은은하던 조명과, 선선하던 바람과, 나른했던 목소리와, 가볍게 스치던 피부의 예리한 감각 같은 것들 전부 다 좋았지. 그 날의 네가 자주 생각날 거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말이 된다는 감각, 그 감각에 모든 걸 걸어도 좋겠다는 마음이었어.

이야기를 좋아해. 그럴듯한 이야기에 대한 갈망으로 소설과 영화를 찾아다녔던 것 같아. 서사에 약한 타입. 음악을 들을 때도 가사에, 회화를 볼 때조차 알레고리에 탐닉하는 타입. 그러니까, 나는 이야기가 말이 되는 사람을 찾아 떠돌고 있는 셈이야. 너와 느린 걸음으로 대화를 나누면서도, 속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상상해 봤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너와의 쓸쓸하지만 그럴듯했을 이야기를 말이야.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여행길에서 돌아와 아직도 추억에 흠뻑 젖어있는 너에게서.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일. 손쉽게 흘러가버리도 말았을 순간을, 나는, 우리는 언제쯤 캐치할 수 있을까? 지금이 그 순간인지 도무지 알아챌 방도가 없는데도.

그래도 나는 이 망상이 꽤나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런 이상할 정도로 근거 없는 확신이 들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상한 그대로의 말이 나올 때마다 깊은 곳의 무언가가 사그러드는 기분이었지만, 때로는 땅으로 꺼지거나 점으로 쪼그라드는 감각이었지만, 생각만큼 구슬프지 않고 오히려 생의 가장자리가 넓어지는 것 같았어. 말이 되는 이야기를 만난다는 건 그만큼 희소하고도 고귀한 경험이니까. 유예된 행복감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기분이었으니까. 금방이라도 타올라 없어질 양초처럼.

어때, 나름대로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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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의 문제

 

연휴동안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At the Will of the Body: Reflections on Illness>를 읽었다. 사회학자인 프랭크는 39살과 40살에 갑작스럽게 심장마비와 암을 겪으면서, 삶과 질병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얻는다. 이 책은 그가 아픈 몸을 살아내면서 가졌던 생각들을 엮은 에세이집이다.

 

그런데 기회라니. 질병이 어떻게 삶에 기회일 수 있을까?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이따금 아프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중병을 앓아본 일은 없다. 내 삶이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적도 없다. 며칠간 불편에 시달리기도 하고, 뭔가 몸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한 날도 있었지만, 결코 온전한 몸에 대한 환상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비가역적인 질병을 겪어내고 자신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삶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통찰을 갖게 되었다는 프랭크의 증언에는 얼마간 거리감을 느끼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삶을 대하는 프랭크의 태도는 확실히 감동적이다. 질병을 겪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삶의 모습들, 새롭게 느꼈던 감정들, 상실감과 두려움, 고독감, 희망과 좌절까지 전부 그 자체로 자신의 삶으로서 긍정하려는 태도 말이다. 그는 자신의 회복에 안도하면서도, 그 것이 전적으로 우연한 결과임을 인정한다. 그는 불멸의 의지로 고통을 이겨낸 것도, 신의 은총으로 축복받은 것도 아님을 안다. 그저 아픈 몸을 묵묵히 살아냈을 뿐이다. 그리고 묵묵히 살아낸다는 것이 질병의 회복 여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서글픈 진실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그가 살아온 삶의 모습임을 존중한다. 요컨대 이 책이 주는 울림은 내용보다 태도에서 온다.

 

아픈 몸을 살아낸다는 것은, 떨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입학하고, 친했던 친구와 절교하고, 자신을 돌보지 못할 만큼 사랑에 빠지고,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또 그 것을 잃어버리고, 옛날 일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기는 일 만큼이나 삶의 한 모습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질병 서사와 의료윤리에 관한 이야기는 오히려 부차적이다. 생에 집착하지 않는 관조적 태도야말로 이 책에서 읽어야 할 교훈이었다. 제멋대로 한 오독일 뿐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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