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라는 친구가 있었다.

 

모두가 과자라고 불렀다.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에 나오는 꼽추의 이름을 따서 콰지모도라는 아이디를 쓰는 친구였다. 아이디가 너무 길어서 줄여 부른 것인지, 아니면 키읔의 파열음이 주는 거리감을 완화하려던 것인지, 콰지모도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고 그냥 과자또는 과자씨라고 불렀다. 어쩌면 콰지모도가 주는 대담하고 이국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상반되었던 그 친구의 수더분한 성격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자는 자주 한가했다. 역시나 한가했던 18살의 나는 꽤 많은 시간을 과자와 보냈다. 그 때 나는 고등학교를 그만 두고 서울에 올라와서 별다른 일정 없이 책이나 읽던 한량이었고, 과자도 탈학교 청소년을 위한 대학로의 어느 대안학교에 비정기적으로 출석하는 것 이외에 할 일이 없었다. 이외에도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이 몇 명 더 있었는데, 그 중에는 내가 한 때 좋아했던 친구도, 나를 한 때 좋아했던 친구도, 대판 싸우고 연을 끊은 친구도, 아주 일찍 생을 마감해버린 친구도 있었다. 어쨌거나 다들 돈은 없고 시간은 많은 착한 아이들이었다.

 

돈은 없고 시간은 많던 우리는, 자주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로니에의 벤치에서 자주 수다를 떨었고, 한강 공원에서 라면에 술을 마시기도 했고, 하늘공원에서 야외상영을 보았다. 맥주 한 봉지 사들고 낙산공원을 뛰어 오른 일도 있었다. 과자는 덕후 기질이 있어서 <파리의 노트르담><네 멋대로 해라> 이야기를 자주 했다(물론 후자는 고다르의 영화가 아니었다). 나도 내가 좋아하던 영화나 소설 이야기를 자주 했지만,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미묘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과자는 자주 집을 나왔다. 왜 집을 나왔는지는 다들 잘 물어보지 않는 편이었다. 언젠가 모임 약속을 잡아서 공원에서 만났을 때엔, 일주일 째 집에 안 들어갔다면서 약간 시큼한 냄새를 풍기기도 했다. 과자가 집을 나오면 연락 가능한 핸드폰도 없어서 이메일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약속에 늦어도 알릴 길이 없으니 한 시간쯤 일찍 나와서 근처를 배회하는 것이 예사였다. 과자는 가끔은 내 자취방에도 문득 찾아와 하룻밤씩 자고 가기도 했다. 또 가끔은 부모님이 여행을 떠나셨다는 친구 집으로 다 같이 몰려가서 떠들썩하게 밤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로는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모두 귀가하는 편이었고, 친구들은 과자에게 오늘 밤은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대화주제가 되지 않도록 배려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꺼려했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과자가 어디에서 자는지 아무도 모른 채 서둘러 인사하곤 헤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늦게까지 놀다가 함께 노숙을 한 일도 있었다. 아마도 초여름이었을 것이다. 낮이 무척 더웠기 때문에, 이 정도 날씨라면 노숙을 해도 괜찮겠다 싶어서 과자의 리드를 따르기로 했다. 과자는 밤의 길거리가 무척 춥다며 어딘가에서 버려진 신문지를 주워왔다. 신문지를 구겨서 옷 사이에 솜처럼 잔뜩 채워 넣었다. 한강변의 어느 굴다리 아래에서, 우리는 오들오들 떨면서 밤새 시덥 잖은 이야기를 나눴다. 초여름의 밤이 그렇게 추운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과자와는 즐거운 시간을 많이 보냈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과자에게 좋은 친구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 너무나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다. 과자에게는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지만, 나는 듣기보다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과자를 잘 모르는 다른 친구와 함께 만났던 어느 날, 그 친구는 과자의 발냄새를 놀려댔다. 나는 친구를 나무라는 대신 함께 과자의 발을 가리키며 웃었다. 그 날 과자의 표정이 자주 떠오른다. 과자는 평소처럼 쾌활하게 웃어넘기는 대신, 약간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대학을 갔고, 한동안 과자를 만나지 못했다. 과자와 보냈던 시간들이 기억 언저리에서 잊혀질 즈음, 다른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혹시 과자랑 연락이 되니?” 과자가 집을 나간 지 몇 달이 지났고, 혜화역 학교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이메일 답장도 없고, 최근에는 네이버 블로그도 폐쇄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별일 아닐거야. 어디서 평소처럼 잘 살고 있겠지 뭐. 가출은 자주 했었잖아?” 그러나 평소와 다르다는 것은 그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네이버 블로그와 이메일은 과자가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 후로 겨울이 오면 가끔은 걱정을 했다. 여름에야 어떻게든 노숙이라도 한다지만, 추운 한겨울에는 어쩌나. 그런 걱정은 아주 가끔 내 안온한 삶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만 왔다. 옛날에 그런 친구가 있었는데, 라고 추억할 정도로만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그 후로 한번도 과자를 보지 못했다.

 

얼마 전에 전고운 감독의 영화 <소공녀>를 봤다. 소공녀는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할 수 없어서 집을 포기하기로 한다. 얼마간은 친구 집을 전전하기도 하지만, 결국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게 사라져버린다. 사라져버린 소공녀를 가끔 추억하는 친구들은, 안온한 삶을 끌어안고 산다. 그 안온한 삶에도 걱정과 고민이 가득하다. 그러니, 누구도 소공녀를 재워줄 수 없다. 소공녀의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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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위생적인 사랑, <Shape of Water>

 

A는 근래에 본 영화 중 가장 좋았다고 했다. B는 자기 인생영화 리스트에 들었다고 했다. C2000년대 이후 최고의 영화라고 했다. 나는 캡쳐 한 장면을 프로필에 걸어두었다. 누가 뭐래든, 좋은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이야기는 <미녀와 야수>와 닮아있다. 미녀는 미녀가 아니고, 야수는 야수가 아니라는 점만 빼면. 많은 지점에서 두 이야기는 전혀 다르지만, 상당히 비슷한 이야기로 읽힌다. 악당 스트릭랜드가 <미녀와 야수>의 개스통을 빼다박았기 때문이다. 두 이야기에서 잘생기고 강하며 당당한 백인 청년은 영화가 혐오하는 모든 것을 상징한다. 힘과 권력을 숭상하고, 낯설거나 이질적인 것을 배척하며, 약하고 가련한 것에 대한 연민이 없고, 지식을 나약한 것으로 치부한다. 스트릭랜드는 실은 캡틴아메리카같은 아폴론적 영웅이지만, 너무나 전형적인 악당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전복적으로 느껴지지조차 않는다. 장애인, 동성애자, 흑인, 여성, 외국인 등 사회적 약자가 총동원된 영웅군단조차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자연스럽다.

이 영화가 진짜 전복적인 지점은 미적으로 혐오스러운 괴물이다. <미녀의 야수>에서의 야수는 공포스럽긴 하지만 여전히 잘생긴 사자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의 괴물은 낯설고, 징그럽고, 비위생적이다. 감독 자신처럼 괴물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야 일반적으로 좋아하기 어려운 형상이다. 그러니 감독은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질문한다. “너는 이렇게 못생긴 괴물을 사랑할 수 있겠니?” 다시 말해, 낯설고 거북한 존재에게 기꺼이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미학은 이야기와 직접 연결된다. 낯설고, 징그럽고, 비위생적인 이 다리달린 양서류 괴물이 아름답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열린 미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 쉽게 사랑에 빠질테지만, 편견 덩어리라면 결코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절대 모를거야!” 젤다의 외침은 결코 괴물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할 자들, 결코 엘라이자같은 사랑을 하지 못할 자들, 결코 다른 존재와 진정으로 소통하는 기쁨을 모를 자들, 그저 차를 바꾸고 승진을 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일에만 몰두할 무수히 많은 스트릭랜드를 향한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와 친구는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지쳐있었다. 너무나 비위생적으로 아름다웠던 사랑이 그렇게 끝났으므로, 일상으로 돌아올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나 자기 여자 친구를 재촉하던 젊은 남자를 이유 없이 미워했다. 너 같은 놈이 바로 스트릭랜드야. 영문도 모르게 타인의 혐오를 받은 커플이 유유히 상영관을 빠져나갔다. 나는 감상에 빠진 나를 널리 전시하기 위해 캡쳐 장면을 검색하다가, 괴물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장면으로 골라 프로필에 걸어두었다. 나도 못생기고 비위생적인 건 싫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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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을 갈까 말까 며칠을 망설이다가 내일자 항공권을 질렀다. 짐 자무쉬Jim Jarmusch의 신작 <패터슨Paterson>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패터슨>은 시적이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문언 그대로 마치 시와 같다는 말이다. 시는 그저 단어들이다. 단어에는 표정이 없다. 단어의 선택로부터 표정을 짐작해 볼 뿐이다. 영화의 시선도, 남주 아담 드라이버Adam Driver의 연기도, 종이에 적힌 시처럼 담담해서 모호하다. 그리고 그 담담함이 감정의 진폭을 넓힌다.

 

주인공은 말하자면 방구석 시인이다. 위대한 시인도 몇명을 탄생시킨 조용한 소도시 패터슨에서 그는 혼자서 가끔 시를 쓴다. 비밀노트에 적어내려간 몇 편의 시가 언젠가 세상에 공개된다면, 어쩌면 위대한 시로 칭송받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은 아마도 그저그런 시시한 시겠지만. 그렇게 혼자서 시를 쓰는 사람에게 과연 영화가 될만한 사건이 일어날까? 뭐,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영화가 종이에 적힌 활자처럼 담담하니 각자의 독법으로 읽어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삶 속에서 예술적 열정을 잃지 말자는 낙관적인 영화인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대단히 염세적이다. 이 세상에 해맑은 시는 없다던 어느 작가님의 말처럼, 이 영화시에는 담담한 비관주의가 팽배하다. 그러나 최하의 삶을 잔잔한 미소로 노래하는 블루스처럼 너그럽다.

 

언젠가 친한 친구 두셋과 자작시 동인을 꾸린 적도 있었다. 그 때 시를 끄적이던 노트는 이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런던행 비행기를 예매하면서, 작은 노트도 하나 샀다. 재생지가 얇고 매끄러운 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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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

 

사랑은 보편적이지만, 사랑의 조건은 제각각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랑 이야기는 보편적인 서사를 개별적인 사랑의 조건이 드러나도록 잘 세공해야 한다. 우리는 삶에 관한 진실을 깨닫기 위해 허구의 이야기를 본다. 진실로 믿을만큼 훌륭한 거짓말은 사소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신은 디테일에 있다.

 

내가 미국인이었더라도 <살인의 추억>을 최고의 영화로 꼽았을까? 아닐 것이다. 잘 만든 스릴러이긴 하지만, 인생의 영화라고 할 것은 아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내가 조용구(폭력경찰)라는 인물을 가장 좋아하게 된 것을 나의 한국적 배경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조용구라는 인물의 입체성이 좋다. 가끔은 그의 인생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서글퍼진다.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닌 인물에 이렇게 빠져버린 건, 그만큼 디테일이 훌륭한 거짓말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봉준호의 <옥자>는 재미있다. 서사가 난폭하게 튀지만 장점이 될 뿐이다. 주제도 시의성이 있고, 풀어나가는 방식도 흥미롭다. 미야자키 하야오 풍의 동화적인 분위기가 있지만, 동시에 장피에르 주네 식의 기묘함이 공존한다. 생각보다 잔인하지만, 관객을 불필요하게 고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옥자>는 결코 명작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넷플릭스는 길이 남을 명작을 만들 생각도 없었겠지만. <옥자>는 현실과 환상에 반쯤 걸쳐있다. 현실의 서울과 뉴욕이 익숙한 공간으로 등장하지만, 결국 낯선 모험이 펼쳐지는 가상의 공간일 뿐이다. 의미있게 등장하는 사회적 디테일들, 예컨대 4대보험, 사설경비업체, 유별난 경영자 자매같은 블랙유머들은 확장되는 일 없이 판타지 속에서 일회적으로 소비된다. 이는 <살인의추억>이나 <괴물>같은 봉감독의 위대한 성취와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이다. 아예 차라리 환상 속으로 뛰어들어서 더 그럴듯한 거짓말의 세계를 창조했으면 어땠을까? 하긴, 그러려니 이미 <설국열차>라는 실패 사례가 있다.

 

어쨌거나 모자이크처럼 시골과 도시, 서울과 뉴욕, 현실과 환상, 블랙유머와 교훈드라마, 모험액션과 잔혹드라마를 거칠게 이어붙인 <옥자>는 서로 다른 분위기의 공존이라는 위태로운 과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고 있기는 하다. 넷플릭스와 극장개봉으로 태생부터 하이브리드였으니, 잘 어울리는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옥자를 보면 넷플릭스가 염두에 둔 주 고객층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미국 영화관객은 동양인 감독이 만든 동물권 이야기를 보고싶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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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극장에서 혼자 봤다.

 

홍상수 영화가 맨날 똑같지 뭐, 하는 마음으로 들어가서 또 재밌게 봤다. 홍상수 근작 중에는 가장 좋은 것 같다. 특히 김민희의 연기가 아주아주 좋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쿡쿡 찌른다. <아가씨>에서도 그랬지만, 김민희는 히스테릭하게 소리지를 때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기이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다.

 

술냄새 진동하는 단체씬은 여느때나 다름없고, 홍상수 특유의 뜬금포 줌인 기법도 보는 맛이 쏠쏠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특히 좋았던 이유는 드물게도 여-여 케미가 매우 훌륭하기 때문이다. 전작들 중에 이런 적이 있었던가? 그동안 여러 뮤즈가 주인공으로 나왔지만, 대부분 홍상수분신 또는 미니홍상수 또는 홍상수워너비 사이를 뱅뱅 맴돌 뿐이었다. 달리 말하면, 홍상수의 전작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홍상수였다. 그러나 이번 김민희는 진짜 주인공이다. 그리고 김민희-서영화, 김민희-송선미의 케미는 나머지 남배우들과의 관계보다 훨씬 돋보인다. 김민희-서영화는 이상하게 중독적이면서도 편안하고, 김민희-송선미는 묘하게 긴장되면서도 자연스럽다. 비로소 홍상수의 세계가 자의식으로부터 파트너에게로 확장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남자들도 느낌이 조금 다르다.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이 후기작으로 갈수록 점점 더 ‘인간’이 된 건 사실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조금도 불편함이 없다. 처음 권해효가 등장했을 때의 약간의 긴장감을 제외하면, 모두 찌질함 없는 젠틀맨이 되었다. 홍상수맨에 깊은 애착을 갖고 열심히 경멸했던 나로써는 아쉬울 만도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사랑은 사람을 얼마나 바꿔놓는 것일까.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얄팍한 궁예질로 만족하기로 한다.

 

다만, 홍상수의 변명은 사족이다. (물론 홍상수의 변명이 아니라 김민희의 동요하는 내면이라고 주장하면 할 말은 없으나) 불륜이 불륜이지 뭐. 대단한 로맨스일 일도 악담을 퍼부을 일도 아니다. 굳이 찾아와 이 영화를 본 관객에게 설교할 것도 아닐 뿐더러, 변명할 일이 아니라는 말로 정작 변명하고 있지 않은가. 쿨한 척 하는 예술가의 쫄보근성을 엿본 것 같아서 다소 초라한 느낌이었다. 그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성취에 집중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예컨대 홀로 화면을 채우는 것만으로 관객을 외롭게 만드는 김민희의 공허하면서도 매력적인 눈매같은 것 말이다.

 

홍상수 영화를 정색하고 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상을 여럿 받았어도 마찬가지. 가끔 홍상수를 영화의 신처럼 추앙하는 사람을 보면 사실 나는 안목을 의심하게 된다. 그의 영화는 때로는 우습고 때로는 경이롭다. 그러나 어느 모로 봐도 자의식 과잉의 통속적 예술가일 뿐이다. 두 시간 피식대다가 마음을 울리는 한두 씬 건지면 그만이다. (예를 들어, 해변에 홀로 누운 씬은 너무 외롭고 아름다워서 충격받을 정도였으나, 복면맨의 등장이나 큰절씬은 좀 투머치 유치뽕이었다.) 나는 홍상수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팬이지만, 그 팬심은 레드벨벳을 향한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영화는 영화로 즐길 수 있도록 홍상수맨은 이제 그만 나타났으면 좋겠다. (불륜이라는 단어만 보면 날뛰는 성난 군중은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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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막스 리히터의 다른 곡으로 <컨택트>와 무관하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아마도 대학교 1학년에 처음 읽었다. 당시에 그 책에 너무나도 큰 감동을 받은 나머지 취향도 잘 모르는 동기의 생일 선물로 사주며 읽을 것을 강요했던 것 같다. (아마도 지금 연극판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옥자...?) 저 소설집에 실린 모든 소설이 다 좋았지만, 특히 세 편 정도를 가장 좋아했다. 표제작이기도 한 <당신 인생의 이야기>, <바빌론의 탑>, 그리고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오늘 <컨택트Arrival>을 보러 가면서, 도대체 테드 창의 소설을 어떻게 영화화할 수 있는지 몹시도 궁금했다. 외계인과 지구인의 첫 조우라는 일견 스펙터클한 표면적 서사와는 달리,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언어와 시간에 관한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나로써는 시각화했을 때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지는 둘째치고, 시각화가 가능한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초장부터 내가 좋아하는 막스 리히터로 마음을 두들겨 놓더니, 미지를 향한 호기심에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가, 결국 수미쌍관의 교차편집으로 나를 울려놓고 말았다. 원작과는 다른 부분이 좀 있지만, 오히려 영화에 디테일을 부여하고 훌륭한 시각화가 가능하게 한 것 같다. 큰 기대 안하고 시간 떼우러 갔다가 깜짝 놀라서 왔다.

 

배급사가 왜 제목을 근본 없이 컨택트로 정했는지는 의아하지만(관객들이 동명의 유명한 작품을 연상하기를 기대한 것일까), 영화의 방점은 컨택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어라이벌이므로, 여러모로 잘못된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arrival이기도 하지만, a new era의 arrival이기도 하므로.

 

내일 아침에 도서관으로 테드 창 소설집 빌리러 간다.

 

cf. 감독이 <블레이드 러너> 후속작도 만든다는 것 같은데, 눈여겨 봐야겠다. 참고로 드니 빌뇌브 감독은 퀘벡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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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온 모리스> 채드 하티건 / Morris from America by Chad Hartigan

전주국제영화제JIFF 야외상영작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 온 모리스는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주변인이다. 그리고 자기가 주변인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모리스에게 힙합이 EDM보다 쿨하고, 풋볼이 사커보다 재밌으며, 망할 독일어도 배우고 싶지 않다. 외국인으로서의 어려움과 사춘기적 혼란이 겹쳐 모리스는 외로운 상태다.

  그러나 힙합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며 친구를 만들어간다는 뻔한 이야기로 달려가지 않는다. 힙합은 그저 지나가는 작은 에피소드일 뿐, 모리스에게 허들을 넘는 그 결정적 순간은 없다. 연적이 만들어 준 무대에서의 적당히 덜 허접한 프리스타일도 그저 소소한 경험일 뿐이다. 모리스의 아버지도, 모리스도, 모리스의 독일어 선생님도, 극적인 성취 없이 그럭저럭 고민하며 살아간다.

  오히려 관객의 시선을 끄는 것은 카트린이다. 위태위태한 사춘기를 살아가는 카트린은 독일적인 무료함에서 탈출하고 싶다. 그러나 그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음을 누구와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 범상한 시각밖에 갖지 못한 나 같은 관객에게 카트린의 어른 흉내는 위험해 보인다. 청춘은 화려한 타인의 삶밖에 노래할 줄 모른다. 허망한 욕망이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이야기다. 봄바람 부는 선선한 저녁에 야외에 앉아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나는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던 것일까. 모리스의 성장담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다보니 신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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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셸 랑 Rachel Lang, 전주국제영화제JIFF


안나는 보잘 것 없는 청춘이다. 부푼 꿈을 안고 고향 스트라스부르를 떠나 독일에 왔건만 하찮은 일 밖에 맡지 못하고 욕이나 먹고 있다. 하루를 망쳐버리고 나니 수중에는 렌트업체에 반납해야 할 슈퍼카 한대와 파티용 드레스. 안나는 그대로 할머니 댁을 향한다. 할머니만은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품어주리라 생각한 것일까. 편찮은 할머니가 목욕 중에 다쳤다는 소식을 듣자 안나는 욕실을 뜯어고치기로 결심한다.

안나는 21세기를 표류하는 프랑스 여성이다. 짧은 숏컷에 톰보이 스타일을 고집하며 바보 같은 성적 편견에 휘둘리지 않는다. 여성에게 사회는 평등해졌고 성적으로 개방되었으며 누구나 (심지어 국경을 넘어서) 자기가 원하는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사회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니, 안나의 보잘 것 없는 삶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다. 결국 안나에게는 허드렛일밖에 주어지지 않고, 성적 개방은 무책임한 관계에 대한 그럴싸한 변명이 되었지만,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다. 안나는 배관공 대신 큰 망치를 집어들 정도로 페미니즘의 이상을 좇지만, 그렇다고 딱히 안나가 화를 내거나 돌을 던질 대상도 없다.

정치적인 영화는 아니다. 그저 청춘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담담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지키지 못한 약속들. 잘못된 선택들과 갈피를 잡기 어려운 삶.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는 구세대의 시선. 슈퍼카와 찍은 멋진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며 아우토반을 신나게 달리고 싶지만, 아직 그런 삶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삶이 비정치적일 수 있을까.

안나는 할머니에게 바덴바덴으로 휴양을 가자고 말한다. 안나에게도 얼마든지 할머니를 바덴바덴으로 모실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청춘에게,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거라는 위로는 별 의미가 없다. 설령 안나처럼 표류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아마르처럼 모든 여유를 버려야 한다.

욕실 공사하듯 뚝딱 자신의 삶을 뜯어고칠 수는 없다. 그러나 타일을 뜯고, 욕조를 드러내고, 시멘트를 바르다보면 언젠가는 그럭저럭 쓸 만한 욕실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청춘은 그렇게 믿고 무턱대고 작업을 시작해보는 수밖에 없다. 아마도, 너무 늦게 완성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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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마나한 이야기_

  영화 <캐롤>을 봤다. 과연 대단한 분위기의 영화다. 케이트 블란쳇의 눈빛과 태도에 홀려버릴 것 같았다.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세 번 정도 전율이 있었다. 멜로영화에서는 드문 일이다. 특히 시각적으로 황홀한 경험이었다. 전후 뉴욕의 분위기를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은 나의 감상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감상에 대한 불만글에 가깝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캐롤>에 관한 영화평을 좀 찾아본 게 화근이다. 답답해서 글을 안쓸 수 없었다.

  영화평들이 전부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랑 같은 영화를 본 게 맞는지 따져 묻고 싶을 정도다. 예컨대 많은 수의 감상이 “동성애를 제쳐놓고 보면 그저 보편적인 사랑일 뿐이다”라고 적고 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동성애 영화에서 동성애를 제쳐놓고 볼 이유는 무엇이며, 보편적인 사랑을 말하지 않는 멜로영화는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러한 영화평이 문제적인 이유는, 이 영화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뿐더러 심지어 정면으로 반하는 감상이기 때문이다. 어떤 유명 평론가는 “레즈비언이라기보다는 그 캐롤을 사랑한 것인데 그 캐롤이 하필 여자였던 것”이라는 말도 했다는데, 미친놈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날 화나게 하는 하나마나한 영화평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이다: 1) 동성애도 사랑임을 강조하며 애써 ‘정당화’하려는 영화평, 2) 보편적 사랑을 강조하며 동성애를 ‘삭제’하려는 영화평.

  1) <캐롤>의 감상에는 보편적 사랑이야기라는 ‘정당화’가 전혀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영화의 태도와 시각이 전혀 그러한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캐롤과 테레즈의 운명적인 만남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동성애에 관한 정치적 태도를 의식적으로 배제한다. 말하자면, 동성애의 ‘인정 여부’는 감독의 안중에 없다. 그런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동성애도 사랑이란다’ 운운하는 건 <캐롤>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하나마나한 혼잣말이다. 마치 윌 스미스의 <핸콕>를 보고 나서 “비록 흑인이 주인공이지만 보편적인 히어로물이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런 감상은 영화평이 아니라 자기 편견에 관한 고해성사가 될 뿐이다. 다른 헤테로 멜로영화를 보면서 ‘그래, 이것도 보편적 사랑일 뿐이야’라고 정당화해본 적이 있는가? 그래야 할 필요성이라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아니라면 왜 <캐롤>에 대해서 그런 영화평을 늘어놓는가? 정당화를 요구하는 동성애 영화도 많다. 정치적 독법이 필요한 영화도 많다. 하지만 <캐롤>만큼은 절대 아니다. 명시적인 무정치성이야말로 이 영화의 정치적 태도이다.

  2) 더 큰 문제는 동성애를 ‘삭제’하고 보편적 사랑으로 읽으려는 감상이다. 이러한 영화평들은 결국 이 영화의 모든 훌륭한 성취를 외면하게 만든다. 애초에 보편적 사랑 운운하는 것도 웃기지만, 모든 보편성은 잘 그려진 특수성으로부터 나온다. 이 영화가 캐롤과 테레즈의 감정선과 고뇌를 훌륭하게 드러냈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오직 1950년대 레즈비언의 사랑의 조건을 세심하게 포착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랑은 보편적이지만 그 조건은 제각각이다. 제각각의 조건을 탈각시키지 않는 것이 사랑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길이다. 그리고 <캐롤>은 매우 훌륭하게, 그러나 오버하지 않고, 이를 묘사한다. 그러니 동성애는 ‘불편’하니 그저 보편적 사랑이야기로만 읽겠다는 관객은 이 영화의 모든 훌륭한 점을 오독하고 있는 것이다. <오만과 편견>에서 16세기 영국을 지우거나 <타이타닉>에서 19세기의 계급성을 지우려는 시도나 얼마나 허망한 것일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런 이야기들은 <캐롤>의 감상과 무관한 시민적 기본교양에 속하는 것이다. 하나마나한 이야기 대신에 <캐롤>에 관하여 다음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1) 우유부단하고 나약해보이던 테레즈의 의외의 결단의 순간들에 대하여(그리고 변화의 원동력이 사랑에 대하여) 2) ‘표면적으로는’ 캐롤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둘 사이의 권력관계에 대하여 3) 지극히 무신경하고 도무지 인정할 줄 모르는 <캐롤>의 남자들에 대하여(그리고 <캐롤>과 역-벡델테스트) 4) 흐릿한 유리와 거울을 통해 상대방을 보는 장면들에 대하여 5) LP샵에서의 레즈비언 커플의 의미에 대하여 6) 수미쌍관식 구성의 탁월함에 대하여 7) 홈파티에서 테레즈의 시선을 끌던 여성과의 대화에 대하여(테레즈의 개안?) 8) 그리고 몹시도 훌륭했던 OST의 활용! 기타등등 기타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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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랍스터>

놀이/영화 2015.12.16 00:15

사랑과 인생에 관한 알레고리로 가득한 영화, <더 랍스터>를 봤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힐 알레고리들.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도,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로도, 심지어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겠다. 나는 (평범하게도) 사랑에 대한 냉소로 읽었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기껏해야 카드 뒤집기 게임처럼 얼떨결에 짝을 맞춰가는 것. 혹은 모두를(자신을 포함하여) 속여가며 평생을 연기하는 것.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고 서로에게 총질할 수도 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부분이 다르단 걸 확인하는 순간 짜게 식어버리고 마는 것. 서로에게 감정을 강요하며 거대한 사기에 동참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

 

그럼에도, 사랑이 오고야 마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정작 사랑을 찾을 때엔 없다가,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척 하는 것보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하는 게 더 어려움을 절실히 깨달을 정도로 도저히 오지 않다가, 마침내 모든 것을 체념하고 탈주하는 순간 덥썩 나타나버리고 마는 것을, 우리가 어찌할 수 있을까.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정신줄 놓고 사랑하게 만드는 그 아찔한 충동을 어떡하면 좋을까.

 

콜린 파렐의 찌질한 어색함은 이 영화에서도 돋보였다. 하지만 레아 세이두나는 레아 세이두를 리더로 따를 수 있다면 일생을 옆에서 동료로 단지 지켜만 보면서 가슴 아프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레아 세이두가 무덤을 파고 들어가고 시키면 바로 그 자리에 기쁜 마음으로 눕겠다. 그 차가운 단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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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가 더 랍스터 보고 느낀 것들이랑 비슷해서 되게 신기하네요..! 잘 보고 갑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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