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의 문제

 

연휴동안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At the Will of the Body: Reflections on Illness>를 읽었다. 사회학자인 프랭크는 39살과 40살에 갑작스럽게 심장마비와 암을 겪으면서, 삶과 질병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얻는다. 이 책은 그가 아픈 몸을 살아내면서 가졌던 생각들을 엮은 에세이집이다.

 

그런데 기회라니. 질병이 어떻게 삶에 기회일 수 있을까?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이따금 아프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중병을 앓아본 일은 없다. 내 삶이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적도 없다. 며칠간 불편에 시달리기도 하고, 뭔가 몸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한 날도 있었지만, 결코 온전한 몸에 대한 환상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비가역적인 질병을 겪어내고 자신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삶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통찰을 갖게 되었다는 프랭크의 증언에는 얼마간 거리감을 느끼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삶을 대하는 프랭크의 태도는 확실히 감동적이다. 질병을 겪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삶의 모습들, 새롭게 느꼈던 감정들, 상실감과 두려움, 고독감, 희망과 좌절까지 전부 그 자체로 자신의 삶으로서 긍정하려는 태도 말이다. 그는 자신의 회복에 안도하면서도, 그 것이 전적으로 우연한 결과임을 인정한다. 그는 불멸의 의지로 고통을 이겨낸 것도, 신의 은총으로 축복받은 것도 아님을 안다. 그저 아픈 몸을 묵묵히 살아냈을 뿐이다. 그리고 묵묵히 살아낸다는 것이 질병의 회복 여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서글픈 진실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그가 살아온 삶의 모습임을 존중한다. 요컨대 이 책이 주는 울림은 내용보다 태도에서 온다.

 

아픈 몸을 살아낸다는 것은, 떨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입학하고, 친했던 친구와 절교하고, 자신을 돌보지 못할 만큼 사랑에 빠지고,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또 그 것을 잃어버리고, 옛날 일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기는 일 만큼이나 삶의 한 모습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질병 서사와 의료윤리에 관한 이야기는 오히려 부차적이다. 생에 집착하지 않는 관조적 태도야말로 이 책에서 읽어야 할 교훈이었다. 제멋대로 한 오독일 뿐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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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_테드 창

 

영화 <컨택트Arrival>를 관람한 기세를 몰아 테드 창의 중단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를 읽었다. 안그래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간상”을 두고 친구들과 장광설을 늘어놓은 게 엊그제니, 나름대로 시의적절하고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그러나 테드 창은 갈팡질팡했던 것 같다. 쓰고 싶은 게 너무 많이 떠올라버렸는지도 모른다.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주변적 이야기를 적절히 컷트할 필요가 있었겠지만, 작가는 자신이 떠올린 아이디어 스토리의 ‘아이디어’에 지나치게 몰입해버렸다. 특히 후반부에는 겉잡을 수 없이 사변적인 결론으로 치닫는다. (나는 궁예는 아니지만) 중반까지와 이후의 전개를 보면, 최종 결과물은 테드 창이 애초에 쓰고 싶었던 형태의 소설은 아니게 되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창작의 ‘경로의존성’이야말로 이 책의 주제의식에 일관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 할말은 없지만.

 

그럼 과감히 궁예질을 해보자. 애초에 테드 창은 인간과 소프트웨어의 감정적 애착의 형성을 다루고 싶었을 것이다. 인간이 반려동물을 기르듯이 소프트웨어를 기르게 된다면 어떨까. 반려소프트웨어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보고, 그를 기르고 교육하는 일이 인간에게 감적적 유대를 가져다 준다면. 나아가 소프트웨어가 수명을 다할 처지에 있게 된다면. 예컨대 유행이 지나가버려서 더는 업데이트지원이 되지 않는 윈도우 95시대의 게임처럼 말이다. 최종 결과물과 연관성이 적어보이는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라는 제목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나 테드 창은 주체성과 선택이라는 사변적 이야기에 몰입해버렸고, 결국 서사의 중심을 이루는 딜레마는 흔한 가족용 성장드라마와 다를 바 없어졌다. 너무 빨리 자라나 내 손을 떠나게 된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불안한 시선같은 것 말이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에 관한 초기의 구상을 잘만 그렸다면 상당히 슬픈 소설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분간은 누구도 그런 소설을 쓰기 어렵게 되었다. 설익은 아이디어 스토리의 단점은, 유사한 아이디어로 쓴 이야기를 어쩔 수 없는 아류작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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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코의 미소』를 다시 읽었다. 지난 번에「쇼코의 미소」를 읽고, 오로지 선한 의도로 가득찬 주인공들에 대해서 불평했다. 다시 읽고 나니 마음이 바뀌었다. 그리고 최은영 작가님의 팬이 되기로 했다. 특별히 대단히 좋았던 작품이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무리하지 않는 정도로 재미있었다. 어색하다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으나,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문체가 담담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쇼코의 미소』를 읽고나면 좋은 이야기를 잘 들었다는 만족감이 든다. 일종의 작은 어쿠스틱 콘서트라고 할까. 대단한 실력파라는 느낌이 없어도 저절로 빠져드는 소극장의 아늑함이랄까. 작가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이한 관념이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읽었더라도 작가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느끼는 일은 드물다. 작품은 작품이고 작가는 작가니까. 그러나 최은영의 소설을 읽고 나면,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분명 친해져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작가님이 다음 작품도 잘 써내기를 응원하는 팬심 가득한 독자가 되었다.

 

  아마도 작품에서 자전적 목소리가 많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세대의 권작가님이라고 보아도 되겠다. 내가 특히 재밌게 읽은 건 외국사람과 교류하는 대목들이다. 서로 터놓고 소통하길 원하면서도 언어·문화적 차이로 오해가 생길까 두려워 양해를 거듭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제멋대로의 호의와 기대로 반목하게 되는 사람들. 경험에서 나온 듯한 자전적 이야기가 특히 매력적이다. (반면 서영채 문학평론가가 해설하는 조부모와의 정서적 교감 부분은 크게 공감되지는 않았다. 나의 경험적 한계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조부모의 마음을 순하디 순한 무조건적 사랑으로 그리는 것은 조금은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품보다 작가에 호의를 가져도 괜찮은 것일까? 아무리 작가가 마음에 들었다지만, 작품평을 찾아보는 대신 작가의 인터뷰를 검색하는 것은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뭐, 딥러닝 시대에 어울리는 독자의 자세이긴 하다. 훗날 알파고가 아무리 좋은 소설을 써내게 된들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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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 『내 삶의 의미』, 백선희 역, 문학과지성사, 2015

  이 책은 프랑스의 작가  로맹 가리가 라디오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적으로 진술한 녹취록이다. 출생에서부터 죽기 1년 전까지의 삶의 궤적을 두서없이 그린다. 로맹 가리(또는 에밀 아자르)라는 작가의 삶에 흥미가 있다면 재미있을 책이다. (물론 무척 흥미로운 삶이기는 하다.) 혹은 자전적 글쓰기 자체에 관심이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특별히 찾아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작가의 메시지는 이 책의 거의 끝인 109쪽에 이르러야 드러난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삶에 의해 살아진다는 것. 스스로 삶을 선택하기보다는 그저 삶의 대상이 된다는 것.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로맹 가리는 폴란드에서의 기억, 어머니의 프랑스에 대한 집착, 사경을 넘나든 군대에서의 무용담, 외교가에서의 경험, 영화계와의 인연, 전 처들, 저술들, 아이들에 관하여 늘어놓는다.

  그러나 글쓰기로 일가를 이룬 예순다섯의 작가가 자살하기 전 홀연히 출연한 라디오에서 말했다기엔 다소 맥빠지는 결론이 아닌가. 위대한 결론이 언제나 그런 법이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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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에 관한 책을 (계속) 읽고 있다. 민법 공부가 지겨울 때마다 한 챕터씩 읽어나가고 있으니 일종의 취미생활인 셈이다. 공부와 진로의 번뇌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이었지만, 어느새 다소 진지한 독서로 이어지고 있다.

 

세 번째로 읽은 책은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이 쓴 싯다르타의 전기이다. 이전에 읽은 책들과 달리 싯다르타의 생애에 보다 충실한 편이지만, 풍부한 종교학적 논의를 서술의 기본으로 삼고 있어서 불교의 현대적 이해에도 도움이 된다. 특히 (부당하게) 제도화된 불교의 교리로부터 싯다르타 자신의 가르침을 분리하고, 싯다르타의 생애에 덧씌워진 초현실적 외피를 합리적인 시각에서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눈에 띈다. 예컨대 붓다가야에서의 득도의 밤에 관한 <니다나 카타>의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니르바나에 이르는 과정에 관한 상징적 우화로 보고, 이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식이다.

 

그런데 극도로 경쟁적인 이 곳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가능할까? 苦集滅道를 좇아 집착을 버리고 평온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그저 자기도태를 의미하게 되지는 않을까? 오히려 강렬한 집착으로 사는 것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는 아닐까?

 

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편의적으로 오독하기로 했다. 사람이 삶의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태함을 버리고 일상의 모든 측면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오히려 붓다의 가르침에 부합한다고도 볼 수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바른 생활과 노력, 집중을 의미하는 바, 八正道 수행의 일환이라고도 볼 수 있다.

 

버려야 할 것은 결과에 대한 집착이다. 응당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는 집착이 고통을 부른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면 그만이다. 이를 성적으로 증명받고자 하는 욕망, 혼자서 차지하려는 집착이 니르바나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니 나는 아직 멀었다. 잘 쓰여진 붓다의 전기를 읽으며 가장 먼저 든 마음이 책을 사고 싶다는 소유욕이었을 정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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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저자
한강 지음
출판사
창비 | 2014-05-1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 섬세한 감수성과 치밀한 문장으로 인...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욕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한강의 신작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으려면, 여러 번 책장을 덮어야 한다. 안개꽃 자욱한 표지를 바라보며 묵묵히 삼키는 순간을 견뎌야 한다. 심호흡하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 다음 장의 슬픔을 각오해야 한다.


  읽는 내내 선배들을 따라 다녀왔던 망월동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봤던 생생한 사진들, 기록들, 마른 꽃이 놓인 묘역들.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한 채 리어카에 대충 실어 한꺼번에 매장했다던 구묘역의 서늘함. 5. 18을 맞아 단체로 참배 온 사람들과, 여기저기에 휘날리는 리본들과, 격한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와, 간간히 들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과, 그런 것들이 의외로 활기차게 느껴져서 기묘한 축제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 그 후로도 몇 번 더 망월동을 찾았지만, 구묘역은 기억보다 점점 더 초라해 보였고, 그만큼 신묘역의 기념탑은 웅장하고 깔끔해 보였다. 그때의 기억들이 이 소설을 더 생생하고 고통스럽게 읽도록 했는지, 아니면 그나마 견딜 수 있게 해주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소설은 제목의 ‘소년’인 동호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년은 옴니버스로 구성된 각 단편을 꿰뚫는 연결고리가 되어, 5.18을 통과한 여러 삶을 이어준다. 소년은 때로 직접, 때로는 간접적으로만 등장하는데, 입체적인 중층구조가 되어 소년의 이야기, 소년을 스쳐 간 화자의 이야기, 화자의 이야기 속에 남아있는 소년의 흔적을 연결짓게 한다. 그러나 정작 소년의 죽음에 대해서는 매우 간결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는데,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그렇게 간단히 소멸해버린 생에 대해서, 남아있는 사람들은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부여잡고 살아가야 한다.


  작가는 아마도 필사적으로 썼을 것이다. 더는 인간성이 모욕당하지 않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오월에 ‘부서져버린 유리조각’을 맨손으로 쓸어담으면서 생채기가 많이도 났을 것이다. 상처 입은 존재들을 유달리 섬세하게 그려온 작가이기 때문일까. 몇 달간 광주의 기록을 읽으며, 울먹이듯 글을 썼을 작가를 생각했다.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릴 것이다. 이런 잔혹한 사건은 종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폭력이기도 하니까. 상처받은 개인의 내면에 천착해 온 지난 소설들을 생각하면, <소년이 온다>는 의식적으로 외부를 향하는 편이다. 상처에 대한 섬세한 시선을 드러내면서도, “진짜 유리로 만든 인간”들을 위하여 대신 분노하고, 소리친다. 점점 작아져 마침내 사라져버릴 것만 같던 지난 작품들 속 인물에 비하면,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들은 차라리 영웅적이다. 누구도 큰소리로 외치지 못하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발언을 멈추지 않는다. 검은 숯덩어리가 된 페이지를 다시 집어 드는 마음으로.


  각 장 사이에서 삐걱거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제일 튀는 편인 2장은 지나치게 운문적이고 ‘마술적’이다. 후안 룰포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들이었지만, 정작 그 의도와 효과가 무엇인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소설가 한강의 시적 역량에 대해서는 (시로 등단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회의적이다. 문체에서 한강의 장점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역시 3장과 5장으로 생각되는데, 모두 여성 화자이다. 서사적으로 가장 뛰어난 성취는 4장으로, 화자의 계속되는 물음에 독자는 인간을 대표하여 연신 사죄하고 싶은 심정에 빠진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그러나, 소재를 택한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 만큼 광주는 지난 일이 되어버린 것일까. 30년이 넘게 흘렀으니, 이제 5월 광주에 대한 소설을 쓰려면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 독자들이 납득할 것인가. 사족처럼 붙인 에필로그는 작가가 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이제 청년들에게 광주는 자신과 무관한 비극이거나, 그저 역사 속 사건이거나, 심지어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일 것이다. 작가는 그들에게 화를 내거나 돌을 던지는 대신, 묵묵히 이 소설을 써내려갔을 것이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덧///

  오월 광주야말로 내가 최근 좋아하게 된 칸트의 말이 적용되어야 한다.

  “어떤 섬에 범죄자가 있다면 그 섬이 내일 당장 바닥에 가라앉는다 하더라도, 그래서 내일 범죄자가 죽는다 하더라도 그 전에 반드시 인간의 손으로 범죄자를 직접 처단함으로써 훼손된 인간의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이성과 정의는 더럽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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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혹은 1~2년 후에 그때의 고문 가해자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행한 고문행위에 대해 전부 부정했다. 판사들은 고문 피해자들을 증인으로 법정에 불러세웠지만 그들의 혈류라든지 부러진 뼈, 데인 피부는 보려 하지 않고 오직 그들이 긴장해서 말을 더듬고 떠는 모습에만 주목했다. 그리고 보안경찰들이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들이 판사와 그 가족들을 테러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반론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주장을 수용했다. 그토록 엄혹한 시절에도 판사들 가운데는 법관으로서의 독립성을 지키고 사법적 양심을 보여준 명예로운 판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 알비 삭스, <블루 드레스> p. 40

면접순서를 기다리면서 <블루 드레스>를 읽었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다 보안요원의 폭탄테러로 한 눈과 팔은 인권변호사. 이후 넬슨 만델라 대통령에 의해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되어 분열된 조국의 화해를 위한 명판결들을 내린 법관. 화해를 위해서는 진상규명이 최우선이라는 대전제 아래 자신을 공격했던 보안요원마저 사면해준 알비 삭스의 회고록이다.

가볍게 읽으며 긴장을 풀겠다는 의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면접장이라는 사실도 잊을 정도로 책에 몰입했으니까. 그가 인종차별철폐를 위해 조국에서 추방당하고, 팔과 눈을 잃고, 기약 없는 고문을 당하고, 준 내전의 상황에서도 고문과 보복적 테러라는 악순환에 빠지지 않도록 조직원들을 독려하는 이야기를 읽고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은 나의 관대한 복수soft vengeance였다.” 나는 거의 울먹거렸다. 대기실에서 면접을 함께 기다리는 50명이 없었다면, 잠시 책을 덮고 엉엉 울었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에 과몰입한 나는 결국 면접관 앞에서 문제와는 관계 없이 방금 읽은 내용을 두서 없이 떠들어대고 말았다. 10분이 끝나 면접실을 나와 문을 닫는 소리에, 면접관의 뺨을 때린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합격하더라도 알비 삭스같은 법관은 절대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한 나의 프로이트적 말실수였는지도 모른다.

오늘, 인문대 학술제에서 다큐멘터리 <탐욕의 제국>을 보면서 <블루 드레스>의 구절을 떠올렸다. 어눌한 말투와 위축된 목소리로 증언했을 고문 피해자. 확신에 찬 뻔뻔한 목소리로 범죄를 부인했을 고문 가해자. 그리고 더듬거리는 피해자의 증언을 답답해하며 가해자에게 호감을 느꼈을 미친 판사. 그 삼자의 관계를 생각했다. <탐욕의 제국>에 등장하는 피해자들이 왜 더 설득력 있게 문제제기하지 못하는지, 왜 더 ‘세련된’ 방식으로 투쟁하지 못하는지 답답해하는 내 미친 자의식같은 그 판사들을 생각했다.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리고 절박한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그저 막연한 불쾌함을 핑계로 눈을 돌리려는, 마치 지금의 나와 같았을 그 판사들 말이다.

나는 어디까지 더 타협하게 될까. 얼마나 더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갈까. 대법원까지 갈지, 삼성에서 회유해 온다면 어떻게 협상에 임할지 논의하는 장면에서, “이 바보들아, 이제 그만 좀 해요. 그깢 인정이 대수야, 사과가 대수야. 적당히 보상 받으면 됐잖아, 좀 이제 그만 사람처럼 살면 안될까”라고 소리치고 싶어하는 나를 보면서 내가 온 길을 돌아본다. ‘운동의 힘을 믿는다’는 말을 그토록 대책없고 순진한 소리로 치부하게 된 나를 돌이켜본다. 클린룸에 울려퍼지는 기계소리, 입 없는 이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운 가슴 먹먹한 무소음들이 상영실을 울려퍼지는 동안, 나는 점점 더 스크린에서 멀어져 나에게로 침잠해 갔다. 같은 합창반에서 만났다며 “내가 좀 눈에 띄지”라고 웃는 대목에서는 나도 오랜만에 웃었다. 그러나 곧이은 훨씬 더 우울한 침묵. 화가 났다. (무엇에?) 잦은 음소거가 두려웠다.

졸업식장을 떠나는 이들에게 미안했다. 미안하기만 했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찾아보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그러한 방법이 옳다는, 유효하다는, 최선이라는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무기력했다. (이 글은, 그러니까, 오늘의 무기력에 대한 면죄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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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 신해욱


교과서를 읽으며

나는 감동에 젖는다.


아픈 아이들이 아프지 않도록

혼자 죽은 나무들이 외롭지 않도록


정성껏 밑줄을 긋고

한쪽 눈으로 눈물을 흘린다.


칠판에는 하얀 글자들이 가득하고

조금씩 움직인다.


나는 같은 자세로 앉아

자꾸만 같은 줄을 읽으며


나를 지나

그냥 가버리고 마는 이들을

지키고 있다.


죠스처럼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싶어진다.

===


신해욱 시인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아마도 그가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의 목소리로 그의 시와 글을 읽었다. 우리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고서야 그가 동글동글한 눈을 가진 여자임을 알았다. 나는 그의 시를 좋아하기로 결심했다. 눈 덮인 풍경을 뒤로 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렌즈를 바라보던 그 사진이 좋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스밀라에 대한 그의 글을 읽고 눈이 덮인 사진을 보면서, 나는 내가 겨울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를 알았다. 시를 좋아하는 이유라기엔 좀 저급하기는 하다.

 

자꾸만 같은 줄을 읽는 사람. 무신경하게 그냥 지나쳐버리고 마는 어떤 사람들을 위해 자꾸만 자꾸만 같은 줄을 읽을 줄 아는 사람. 혼자 죽은 나무 옆에서 당분간 같이 떨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다. 나를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눈빛 정도는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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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was the best of times,

it was the worst of times,

it was the age of wisdom,

it was the age of foolishness,

it was the epoch of belief,

it was the epoch of incredulity,

it was the season of Light,

it was the season of Darkness,

it was the spring of hope,

it was the winter of despair,

we had everything before us,

we had nothing before us,

we were all going direct to Heaven,

we were all going direct the other way--

in short, the period was so far like the present period, that some of

its noisiest authorities insisted on its being received, for good or for

evil, in the superlative degree of comparison only.


오직 최상급으로만 형용할 수 있을 뿐인 혼란의 혁명기. 뮤지컬 관람에 앞서 디킨즈의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를 읽고 있다. "최상의 시대였고, 최악의 시대였으며..."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도입부는 우리나라에서도 80년대 정치적 격동기에 무척이나 자주 인용됐다고 한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나 당대가 가장 문제적인 시대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소설의 압권은 역시 감옥에서 탈출하는 장면이다. 시드니 카턴이 찰스 다네에게 받아적도록 시키는 대목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시드니 카턴이 루시에게 보내는 편지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If you remember the words that passed between us, long ago, you will readily comprehend this when you see it. You do remember them, I know. It is not in your nature to forget them. I am thankful that the time has come, when I can prove them. That I do so is no subject for regret or grief. If it had been otherwise, I never should have used the longer opportunity. If it had been otherwise. I should but have had so much the more to answer for. If it had been otherwise.


If it had been otherwise... 이 문장이 편지에서 세 번이나 반복된다.


뮤지컬 뮤지컬! 간만에 보러 가는 뮤지컬이라 몹시 신난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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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s, quand d’un passé ancien rien ne subsiste, après la mort des êtres, après la destruction des choses, seules, plus frêles mais plus vivaces, plus immatérielles, plus persistantes, plus fidèles, l’odeur et la saveur restent encore longtemps, comme des âmes, à se rappeler, à attendre, à espérer, sur la ruine de tout le reste, à porter sans fléchir, sur leur gouttelette presque impalpable, l’édifice immense du souvenir.

Et dès que j’eus reconnu le goût du morceau de madeleine trempé dans le tilleul que me donnait ma tante (quoique je ne susse pas encore et dusse remettre à bien plus tard de découvrir pourquoi ce souvenir me rendait si heureux), aussitôt la vieille maison grise sur la rue, où était sa chambre, vint comme un décor de théâtre.


  지금이야 파스쿠치니 자바커피니 하는 커피집이 캠퍼스에 널려있다지만, 내가 처음 학교에 입학했던 6년 전에만 해도 교내에는 갈 만한 곳이 많지 않았다. 사람들이 찾는 군것질꺼리래 봐야 자하연의 커피쏙(냉커피속 아이스크림) 수준이었고, 대부분은 매점에서 앙팡에 빨대 꽂아 먹는 게 고작이었다. 해방터 근처를 오가다 보면 도란도란 입에 요구르트를 물고 벤치에 앉은 사람들이 보이곤 했다. 모두가 소박하던 시절이었다.

  6, 7동을 거의 벗어나지 않던 1학년 시절, 자하연까지 내려가는 것도 귀찮았던 나에게는 8동 앞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먹는 것이 최고의 휴식이었다. 수업이 지겨워지면 나는 몰래 뒷문으로 빠져나와 계단 근처의 벤치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곤 했다. 실제로도 그랬는지, 미화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바라보던 하늘은 무척이나 파랗고 예뻤다. 그렇게 파란 하늘이나, 바람에 흔들리던 나무 같은 걸 보고 있다가도, 하늘하늘한 옷차림의 여학생이라도 지나가면 또 그 발걸음을 눈으로 좇느라 바빴다. 어쨌든, 그 때는 나도 스무살이었으니까.

  자판기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학교 자판기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저렴한 가격이었다. 생협에서 학생복지 차원에서 그렇게 운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외부에서 6~700원 하던 음료들이 교내 자판기에서는 3~400원 하는 경우가 흔했다. 쉬는 시간은 몇 사람의 주머니에 짤랑이던 동전을 모으는 것으로 충분히 보낼 수 있었다. 5000원이 넘는 카라멜 마끼아또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거니와 구할 수도 없었다. 가장 가까운 카페 프렌차이즈는 버스를 타고 10분이나 나가 지하철 역 앞까지 가야 나왔으니까. 신촌 어귀를 드나드는 세련된 대학생들에 비해 유난히 우리 학교 학생들이 촌스럽다는 소문은 아마도 허명은 아니었을 것이다.

  데자와라는 음료가 반드시 있다는 것도 우리학교 자판기의 독특한 점이었다. 사실 나에게는 대학 입학 전까지 데자와의 존재도 생소했다. 어느 쉬는 시간엔가 자판기 앞에 선 나에게 그 선배는 미묘한 미소로 데자와를 권해 왔다. 마치 내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는 의구심을 품은 채 데자와를 들이켰고, “~”하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콕 찝어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역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맛. 걸레 헹군 물에 아기 토한 냄새를 섞어놓은 것 같은 맛. 나는 단번에 반-데자와 전선에 동참했고, -데자와 전선의 선배들과는 건널 수 없는 취향의 벽이 세워졌다. 실로 호불호가 분명하게 나뉘는 음료였다.

  얼마 전, 강남역 근처의 투썸플레이스에 갔다가 얼그레이 라떼를 시켰다. 가능하면 커피 대신 차를 마시는 게 내 최근의 습관이었다. 한 끼 식사 가격의 홍차라떼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어떤 기억들이 떠올랐다. (프루스트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는 일은 없었다. 그냥 어떤 기시감과 향수가 일어났을 뿐이다.) 내가 반-데자와 전선에서 친-데자와 진영으로 넘어가기까지는 딱 1년이 걸렸다. 그 해 겨울 처음 싫어했던 데자와를 이듬해 겨울엔 매일 손에 들고 다녔다. 눈이 끝도 없이 내렸던 혹독한 겨울, 나의 데자와는 따뜻하고도 달콤했다. 식도에서 아랫배까지 뜨겁게 일렁였다. 이후로 내 미각이 그토록 줏대 없이 매혹당한 일은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에게 내 취향의 극적인 전환을 한 번도 고백하지 못했다.


  “사람이 사랑을 할 때,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모조리 담기기엔 사랑은 너무나 크다.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쪽으로 방사되어, 상대의 한 표면에 부딪혀 본래 방사점 쪽으로 튕겨져 돌아온다. 그처럼 우리 자신의 애정이 튕겨져 돌아오는 반동을 우리는 상대방의 감정이라고 일컫는데, 간 것보다 돌아온 것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은, 간 것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임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가리비의 가느다란 홈이 난 조가비 속에 흘려 넣어 구운 듯한, 잘고도 통통한, 쁘띠 마들렌이라고 하는 과자. 추억은 미각이나 후각처럼 비자발적이고도 무의식적인 계기로 돌아오는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시간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내 의지와 무관하다. 아무리 자발적이고 지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한들.


WRITTEN BY
moon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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