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책'에 해당하는 글 13건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43쪽)

 그 날 읽은 문장을 따라 정서가 이리저리 휘날리게 된다. 얼마 전에는 김연수의 문장으로 동굴 속에 숨어들고 싶더니, 한강 연작소설을 읽으면서는 삶에 대한 강렬한 충동이 들었다. 사실 한강 소설을 읽는 건 처음인데, 별 기대 없이 집어든 책 치고는 몰입해서 읽고 있다. (이 책이 그런 건지 한강의 작품들이 일반적으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상징적인 환유가 풍부하고, 다소 예술적 작위가 드러난다. (서울예대 문창과의 향취?)

  그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제 동서라고 부를 필요도 없게 된 그녀의 옛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가치 외의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듯 건조한 얼굴, 상투적이지 않은 어떤 말도 뱉어본 적 없을 속된 입술이 그녀의 몸을 탐했을 거란 상상만으로 그는 일종의 수치를 느꼈다.(105쪽)

 은유는 보편성을, 환유는 개별성을 선전한다고 했던가. 그래서 은유는 강자의 폭력이요, 환유는 약자의 저항이라고 호미 바바는 말한다.(라고 김욱동 교수의 책이 그랬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모든 속물적인 삶의 진부함에 대한 소극적 저항이라고 느꼈다. 정상적 삶을 일탈한 자들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될 때, 다시 말해 "조금도 죄송하지 않은 듯한 말투로 담담히(48쪽)" 목소리를 높일 때 정상/이상, 보편/특이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그리하여 이들의 비정상성을 '교정'하고자 접근하던 '정상인'들은 스스로의 정상성에 대한 의심을 시작하게 되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을 떠나 "잠잠한 평화가 주는 행복을 영원히 잃(122쪽)"게 된다. 타자에 의존해서만 주체를 형성하는 양가성(ambivalence), 다시 말해 근본적으로 타자성을 내부에 품고 있는 주체의 적대적 의존관계는 주체/타자의 구분을 정교화하려 할 수록 내적 모순과 분열에 빠져들게 한다. (아, 과연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굴복하고 말 것인가)

그녀는 베란다 난간 너머로 번쩍이는 황금빛 젖가슴을 내밀고, 주황빛 꽃잎이 분분히 박힌 가랑이를 활짝 벌렸다. 흡사 햇빛이나 바람과 교접하려는 것 같았다. 가까워진 앰뷸런스의 사이렌, 터져나오는 비명과 탄성, 아이들의 고함 ,골목 안으로 모여드는 웅성거리는 소리들을 그는 들었다. 여러개의 급한 발소리들의 층계를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147쪽)

 뜬금없지만, 작가의 이름은 검색어에 오르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강. 동맥처럼 펄떡이는 이미지의 낱말이다. 서늘한 눈매의 작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이름, 문장, 정서를 갖고 있다. 작가의 얼굴을 찾아보는 못된 버릇은 그만둬야 하겠지만.

2010. 9. 30.

WRITTEN BY
moonwon
moonwon.com

트랙백  0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분홍 리본의 시절> _ 권여선

 "새로 이사간 신도시에서의 가을은 그렇게 안온하고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지나갔다. 그해 가을을 회고하면서 내가 품는 의문은 이것이다. 수림도 선배가 저지른 그 많은 실수 중 하나였던가? 그리고 나도? 선배의 아내는 이 모든 사태를 훤히 알고 있었던가? 선배는 아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가?"

 "순간 툭 하고 뭔가 나를 치고 지나갔다. 아니 내가 그것을 툭 쳤는지도 모른다. 곪은 부위처럼 민감한 그것, 오래 전에 단념했다고 믿었던 그것, 그러나 어느 틈에 농익어 진물을 흘리는 그것, 입안에 다소 끈끈하고 신 침을 고이게 하고 미간을 오그라들게 하는 그것, 툭 건드려진 뒤부터 움찔 움찔 움직이며 몸을 비트는 그것. 나는 책장의 흰 가로장에 이마를 대고 울었다. 울면서, 내가 내 뒤통수를 내려찍는 이런 상쾌함이 없다면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무엇이겠는가, 생각했다."

 "나는 내가 기다린 것이 몽골의 남자친구가 아니라 모종의 극단적인 파국이었음을 알고 있다. 언니라고 살갑게 부르면서 선배의 아내를 기망한 나. 호시탐탐 선배에게 가랑이짓을 한 나. 쎅스광인 수림을 한없이 혐오하면서도 온 정력을 다해 질투한 나. 모든 정보를 모른 척 누설한 나. 고립이란 명분 뒤에서 늘 추잡한 연루를 꿈꾸어온 나."

  가쁜 숨을 참듯이 권여선의 문장을 읽었다. 이제 그만, 충분한데, 라고 둘러댈 겨를도 없이 떠밀려버리는 기분. 이해했다고 생각한 말이 다른 이미지에 겹쳐지고 또 겹쳐지면서 나도 몰래 휩쓸려버린 듯한 불쾌감.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좋은 속을 후비고 뒤집어서 꺼내놓을 때의 섬뜩함.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고 머릿속에서 쿵쾅대지만, 어쩐지 문고리를 돌리고 있는 손의 외설적 이질감.

 홍상수는 괴물은 되지 말자고 말하는 스스로의 속물적 괴물성을 조소했지만(메타-조소), 권여선은 자신의 욕망을 혐오함을 욕망(메타-욕망)하고 있다. 그런 권여선의 (메타)욕망을 우울한 자기혐오로 엿보는(욕망하는) 독자는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작가랑 친해지고 싶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


2010. 9. 9.

WRITTEN BY
moonwon
moonwon.com

트랙백  0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

<<1968년의 목소리 -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로널드 프레이저, 안효상 옮김. 박종철 출판사. 2002

"'여름 방학 때 갑자기 멈추어 버리는 이것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혁명인가?'" - p.198
"우리는 항의protest에서 저항resistance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전에 우리는 토론했다. 이제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반대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 p. 206
"... 그러나 그의 사적인 삶에 관하여 그를 도와주는 대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논쟁에 빠져 있었고,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 농담을 했습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의 삶이 그러한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p. 257


   서양의 산업화된 나라들 가운데 여섯 나라 - 미국,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북아일랜드 - 에서 1960년대 후반에 일어난 일련의 학생반란을 당사자들에 의한 구술사적 접근으로 검토한다.
   제목 자체에서도 드러나듯 이 책이 중점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68운동에 참여했던(참여하도록 휩쓸려갔던) "활동가"들의 집단적 정서상태이다. 냉전, 베트남전, 히피 반문화, 보수주의와 이에 대한 반감 등 당대의 정치, 사회, 문화적 조건들에 조응하여 특유의 반항성과 급진성을 수립해 갔던 학생운동의 실제 모습과 사건의 본질을 사후적 진단이나 이론적 체계화로서가 아니라, 그 장본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다가가게 한다.
 
   (역사적 의의의 발견 보다도,) 학생운동의 활동가들에게 훌륭한 지침서가 되리라는 생각. 활동가들이 하는 고민들의 대부분을 이미 거쳐간 서유럽의 활동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겪어냈는지 읽을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본격적인 68혁명의 (갑작스레 폭발한 것처럼 보이는) 전개과정을 다루는 5장보다 그 전사로서의 3장이 더욱 유익하게 빛난다. 역사서를 읽다 보면 무미건조하게 접하는 "사건"들의 배후에 이름과 사연을 가진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망각하게 되는 때가 있다. 역사의 의의가 과거의 사실을 '이해'하는 것에 있다면, 이 책에 드러나는 그들의 증언들이야말로 살아있는 역사가 아닐까.

2010. 9. 8.

WRITTEN BY
moonwon
moonwon.com

트랙백  0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