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막스 리히터의 다른 곡으로 <컨택트>와 무관하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아마도 대학교 1학년에 처음 읽었다. 당시에 그 책에 너무나도 큰 감동을 받은 나머지 취향도 잘 모르는 동기의 생일 선물로 사주며 읽을 것을 강요했던 것 같다. (아마도 지금 연극판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옥자...?) 저 소설집에 실린 모든 소설이 다 좋았지만, 특히 세 편 정도를 가장 좋아했다. 표제작이기도 한 <당신 인생의 이야기>, <바빌론의 탑>, 그리고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오늘 <컨택트Arrival>을 보러 가면서, 도대체 테드 창의 소설을 어떻게 영화화할 수 있는지 몹시도 궁금했다. 외계인과 지구인의 첫 조우라는 일견 스펙터클한 표면적 서사와는 달리,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언어와 시간에 관한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나로써는 시각화했을 때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지는 둘째치고, 시각화가 가능한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초장부터 내가 좋아하는 막스 리히터로 마음을 두들겨 놓더니, 미지를 향한 호기심에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가, 결국 수미쌍관의 교차편집으로 나를 울려놓고 말았다. 원작과는 다른 부분이 좀 있지만, 오히려 영화에 디테일을 부여하고 훌륭한 시각화가 가능하게 한 것 같다. 큰 기대 안하고 시간 떼우러 갔다가 깜짝 놀라서 왔다.

 

배급사가 왜 제목을 근본 없이 컨택트로 정했는지는 의아하지만(관객들이 동명의 유명한 작품을 연상하기를 기대한 것일까), 영화의 방점은 컨택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어라이벌이므로, 여러모로 잘못된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arrival이기도 하지만, a new era의 arrival이기도 하므로.

 

내일 아침에 도서관으로 테드 창 소설집 빌리러 간다.

 

cf. 감독이 <블레이드 러너> 후속작도 만든다는 것 같은데, 눈여겨 봐야겠다. 참고로 드니 빌뇌브 감독은 퀘벡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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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코의 미소』를 다시 읽었다. 지난 번에「쇼코의 미소」를 읽고, 오로지 선한 의도로 가득찬 주인공들에 대해서 불평했다. 다시 읽고 나니 마음이 바뀌었다. 그리고 최은영 작가님의 팬이 되기로 했다. 특별히 대단히 좋았던 작품이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무리하지 않는 정도로 재미있었다. 어색하다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으나,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문체가 담담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쇼코의 미소』를 읽고나면 좋은 이야기를 잘 들었다는 만족감이 든다. 일종의 작은 어쿠스틱 콘서트라고 할까. 대단한 실력파라는 느낌이 없어도 저절로 빠져드는 소극장의 아늑함이랄까. 작가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이한 관념이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읽었더라도 작가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느끼는 일은 드물다. 작품은 작품이고 작가는 작가니까. 그러나 최은영의 소설을 읽고 나면,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분명 친해져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작가님이 다음 작품도 잘 써내기를 응원하는 팬심 가득한 독자가 되었다.

 

  아마도 작품에서 자전적 목소리가 많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세대의 권작가님이라고 보아도 되겠다. 내가 특히 재밌게 읽은 건 외국사람과 교류하는 대목들이다. 서로 터놓고 소통하길 원하면서도 언어·문화적 차이로 오해가 생길까 두려워 양해를 거듭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제멋대로의 호의와 기대로 반목하게 되는 사람들. 경험에서 나온 듯한 자전적 이야기가 특히 매력적이다. (반면 서영채 문학평론가가 해설하는 조부모와의 정서적 교감 부분은 크게 공감되지는 않았다. 나의 경험적 한계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조부모의 마음을 순하디 순한 무조건적 사랑으로 그리는 것은 조금은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품보다 작가에 호의를 가져도 괜찮은 것일까? 아무리 작가가 마음에 들었다지만, 작품평을 찾아보는 대신 작가의 인터뷰를 검색하는 것은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뭐, 딥러닝 시대에 어울리는 독자의 자세이긴 하다. 훗날 알파고가 아무리 좋은 소설을 써내게 된들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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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영화 몇 편

놀이 2017.01.10 17:03

소설과 영화 몇 편

 

종강 후에 소설과 영화를 여럿 보았다. 2016년에 못다한 문화생활을 막판에 몰아서 하는 건지, 2017년에 못다할 문화생활을 초장에 끝내려는 건지, 여하튼 많이 보았다.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감성이 메마른 사람이 되고 있다. 좀처럼 울지 않고 감동받는 일이 드물다. 웃긴 걸 보면 잘 웃는걸 보면, 그냥 소시오패스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법 공부 탓으로 돌릴 마음은 없지만, 수험생의 조급함이라는 게 시야를 좁게 만드는 것 같기는 하다.

 

먼저 기대하던 켄 로치 감독의 신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은 하지만 글쎄.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별점 몇점이냐고 묻는 친구의 말에 3.5/5.0점이라고 대답했다. 좋은 영화에 왜 그렇게 낮은 점수를 줬는지 처음에는 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와서 말하자면 다니엘 블레이크를 그리는 켄 로치의 인간관에 동의할 수 없었다고 말해야 할까. 켄 로치가 그리는 블레이크씨는 지나치게 투명하다. 이웃을 이유도 없이 돕고,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우며(그가 가진 유일한 편견은 성매매에 관한 것일 뿐), 결코 동요하지 않는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조차 스스로 감내할 뿐이다. 켄 로치식의 인민 영웅이다. 그러나 나는 흠결이 없는 영웅담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편의와 목적을 위하여 의도된 납작함으로 납득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보장 시스템의 한계를 고발하려던 것이라면, 영화보다 얼마든지 나은 매체가 있다. 인간을 얄팍하게 그리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려하게 드러낼 수는 없다.

 

비슷한 느낌을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로부터 받았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은 처음 읽었는데, 뻔한 소재를 뻔하게 그리는데도 묘하게 매력이 있다. 담담하고 담백한 서술이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연상시킨다는 평에 크게 공감이 갔다. 그러나, 최은영의 인물들은 모조리 착해빠졌다. 답답할 정도로 착한 사람들이다. 모든 작중 갈등의 원인은 외부에 있다. 잘못된 교육, 사회적 억압, 편견, 그런 것들은 작중 인물의 잘못이 아니다. 오로지 선한 의도로 가득찬 주인공들이 불화하는 것은 사회의 부조리함일 뿐이다. 아마도, 최은영 작가 본인이 그런 사람일 것이다. 오로지 선한 의도로 가득찬 사람. 그러나 나는 이기심과 탐욕, 경멸과 혐오의 감정을 모르는 사람을 작가로서 신뢰할 수 없다. 그런 글은 아무리 재미있어도 그저 잘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작가를 신뢰하지 못하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없다. 정이현의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읽으면서도 들었던 생각이다. 이번 단편집에서는 첫번째 수록작이 유독 재미가 없었다. 정이현은 서울에 사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는 잘 그리지만, 주인공이 남자인 작품은 도저히 감정이입을 할 수가 없었다. 작가의 목소리가 마치 어색한 가면을 쓴 듯 생경하여 몰입하기 어렵다. 남성 작가가 그린 여성 주인공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느끼게 될까? 나머지 작품은 괜찮았으나 첫인상이 좋지 않아서 아쉬웠다.

 

반면 완전히 놓아주기로 마음먹은 작가도 있다.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을 읽으면서는 혹시 <백의 그림자>가 뒷걸음질로 잡은 쥐가 아닐까 생각했다. 나의 문학적 교양이 빈약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새 작품이 나오더라도 굳이 찾아 읽는 일은 없을 것이다. (최은영이나 정이현의 신작은 환영이다)

 

그리고 화제의 <너의 이름은>. 그럭저럭 볼만한 애니메이션이지만, 그 정도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감각적인 표현에는 능숙하지만 인간의 복잡함을 섬세하기 그릴 줄 모른다. 한 편의 뮤직비디오라면 매우 훌륭했을 것이다. 두 주인공인 마츠다나 타키 모두 평면적이기 그지없고, 나머지 인물은 기계적 장치에 불과하며, 신사를 둘러싼 신화적 상상력도 이야기와의 결합이 피상적이다. 모든 운명이 주인공의 각성으로 귀결되어 세카이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야기적 재미의 핵심은 학교생활에 있어야 했지만, 아마도 감독은 그리 인간적으로 풍요로운 학창시절을 보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결핍된 사춘기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될 정도) 결과적으로 모든 것은 일종의 단편적인 스케치의 나열에 불과하게 된다. 그 스케치가 매우 훌륭하므로 나머지 단점을 잘 가려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니 내가 여전히 믿고 찾을 수 있는 것은 10년 전부터 읽은 권여선 작가의 신작 <안녕 주정뱅이>나, 오래된 스타워즈 프랜차이즈인 <로그원> 같은 것들이다. 구관이 명관이다. 취향도 편협한 꼰대가 되어가는 것일까. 새로운 작품을 좋아하게 되는 일이 드물다. 그렇다고 본 작품을 다시 찾는 사람도 아니건만.

 

아, <라라랜드>를 빼놓을 수 없지. 올해 가장 좋았던 영화, 꿈꾸는 기분으로 보았다. 재즈를 매우 좋아하긴 하지만, 사실 그다지 jazzy한 영화는 아니다. 고슬링은 케니지를 조롱하고 있지만, 사실 <라라랜드>는 그야말로 케니지같은 영화니까. (케니지는 좀 심하고 빌 에반스 나 키스 자렛정도?) 긍정 에너지로 톤업된 white-washed <치코와 리타>랄까. <본투비 블루>처럼 재즈에 관한 영화는 전혀 아니고, 사랑과 성공, 만남과 엇갈림에 대한 잘 짜여진 헐리우드 뮤지컬이다. 그래도 좋다. 아무리 게토한 사람이라도 매일같이 마일스 데이비스나 쳇 베이커만 듣고 살 수는 없다. 게다가, 빌 에반스도 역시 대단히 훌륭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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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도 라라랜드의 엠마스톤이 좋아요. 물론 라라랜드를 보진 못했고, 버니 하우스에서 처음 접했지요. 티스토리 하고 싶은데 초대 해주세요. 메일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jangnative@hanmai.net

    jangnativ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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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온 모리스> 채드 하티건 / Morris from America by Chad Hartigan

전주국제영화제JIFF 야외상영작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 온 모리스는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주변인이다. 그리고 자기가 주변인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모리스에게 힙합이 EDM보다 쿨하고, 풋볼이 사커보다 재밌으며, 망할 독일어도 배우고 싶지 않다. 외국인으로서의 어려움과 사춘기적 혼란이 겹쳐 모리스는 외로운 상태다.

  그러나 힙합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며 친구를 만들어간다는 뻔한 이야기로 달려가지 않는다. 힙합은 그저 지나가는 작은 에피소드일 뿐, 모리스에게 허들을 넘는 그 결정적 순간은 없다. 연적이 만들어 준 무대에서의 적당히 덜 허접한 프리스타일도 그저 소소한 경험일 뿐이다. 모리스의 아버지도, 모리스도, 모리스의 독일어 선생님도, 극적인 성취 없이 그럭저럭 고민하며 살아간다.

  오히려 관객의 시선을 끄는 것은 카트린이다. 위태위태한 사춘기를 살아가는 카트린은 독일적인 무료함에서 탈출하고 싶다. 그러나 그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음을 누구와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 범상한 시각밖에 갖지 못한 나 같은 관객에게 카트린의 어른 흉내는 위험해 보인다. 청춘은 화려한 타인의 삶밖에 노래할 줄 모른다. 허망한 욕망이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이야기다. 봄바람 부는 선선한 저녁에 야외에 앉아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나는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던 것일까. 모리스의 성장담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다보니 신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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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 『내 삶의 의미』, 백선희 역, 문학과지성사, 2015

  이 책은 프랑스의 작가  로맹 가리가 라디오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적으로 진술한 녹취록이다. 출생에서부터 죽기 1년 전까지의 삶의 궤적을 두서없이 그린다. 로맹 가리(또는 에밀 아자르)라는 작가의 삶에 흥미가 있다면 재미있을 책이다. (물론 무척 흥미로운 삶이기는 하다.) 혹은 자전적 글쓰기 자체에 관심이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특별히 찾아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작가의 메시지는 이 책의 거의 끝인 109쪽에 이르러야 드러난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삶에 의해 살아진다는 것. 스스로 삶을 선택하기보다는 그저 삶의 대상이 된다는 것.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로맹 가리는 폴란드에서의 기억, 어머니의 프랑스에 대한 집착, 사경을 넘나든 군대에서의 무용담, 외교가에서의 경험, 영화계와의 인연, 전 처들, 저술들, 아이들에 관하여 늘어놓는다.

  그러나 글쓰기로 일가를 이룬 예순다섯의 작가가 자살하기 전 홀연히 출연한 라디오에서 말했다기엔 다소 맥빠지는 결론이 아닌가. 위대한 결론이 언제나 그런 법이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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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셸 랑 Rachel Lang, 전주국제영화제JIFF


안나는 보잘 것 없는 청춘이다. 부푼 꿈을 안고 고향 스트라스부르를 떠나 독일에 왔건만 하찮은 일 밖에 맡지 못하고 욕이나 먹고 있다. 하루를 망쳐버리고 나니 수중에는 렌트업체에 반납해야 할 슈퍼카 한대와 파티용 드레스. 안나는 그대로 할머니 댁을 향한다. 할머니만은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품어주리라 생각한 것일까. 편찮은 할머니가 목욕 중에 다쳤다는 소식을 듣자 안나는 욕실을 뜯어고치기로 결심한다.

안나는 21세기를 표류하는 프랑스 여성이다. 짧은 숏컷에 톰보이 스타일을 고집하며 바보 같은 성적 편견에 휘둘리지 않는다. 여성에게 사회는 평등해졌고 성적으로 개방되었으며 누구나 (심지어 국경을 넘어서) 자기가 원하는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사회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니, 안나의 보잘 것 없는 삶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다. 결국 안나에게는 허드렛일밖에 주어지지 않고, 성적 개방은 무책임한 관계에 대한 그럴싸한 변명이 되었지만,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다. 안나는 배관공 대신 큰 망치를 집어들 정도로 페미니즘의 이상을 좇지만, 그렇다고 딱히 안나가 화를 내거나 돌을 던질 대상도 없다.

정치적인 영화는 아니다. 그저 청춘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담담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지키지 못한 약속들. 잘못된 선택들과 갈피를 잡기 어려운 삶.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는 구세대의 시선. 슈퍼카와 찍은 멋진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며 아우토반을 신나게 달리고 싶지만, 아직 그런 삶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삶이 비정치적일 수 있을까.

안나는 할머니에게 바덴바덴으로 휴양을 가자고 말한다. 안나에게도 얼마든지 할머니를 바덴바덴으로 모실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청춘에게,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거라는 위로는 별 의미가 없다. 설령 안나처럼 표류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아마르처럼 모든 여유를 버려야 한다.

욕실 공사하듯 뚝딱 자신의 삶을 뜯어고칠 수는 없다. 그러나 타일을 뜯고, 욕조를 드러내고, 시멘트를 바르다보면 언젠가는 그럭저럭 쓸 만한 욕실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청춘은 그렇게 믿고 무턱대고 작업을 시작해보는 수밖에 없다. 아마도, 너무 늦게 완성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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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마나한 이야기_

  영화 <캐롤>을 봤다. 과연 대단한 분위기의 영화다. 케이트 블란쳇의 눈빛과 태도에 홀려버릴 것 같았다.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세 번 정도 전율이 있었다. 멜로영화에서는 드문 일이다. 특히 시각적으로 황홀한 경험이었다. 전후 뉴욕의 분위기를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은 나의 감상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감상에 대한 불만글에 가깝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캐롤>에 관한 영화평을 좀 찾아본 게 화근이다. 답답해서 글을 안쓸 수 없었다.

  영화평들이 전부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랑 같은 영화를 본 게 맞는지 따져 묻고 싶을 정도다. 예컨대 많은 수의 감상이 “동성애를 제쳐놓고 보면 그저 보편적인 사랑일 뿐이다”라고 적고 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동성애 영화에서 동성애를 제쳐놓고 볼 이유는 무엇이며, 보편적인 사랑을 말하지 않는 멜로영화는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러한 영화평이 문제적인 이유는, 이 영화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뿐더러 심지어 정면으로 반하는 감상이기 때문이다. 어떤 유명 평론가는 “레즈비언이라기보다는 그 캐롤을 사랑한 것인데 그 캐롤이 하필 여자였던 것”이라는 말도 했다는데, 미친놈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날 화나게 하는 하나마나한 영화평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이다: 1) 동성애도 사랑임을 강조하며 애써 ‘정당화’하려는 영화평, 2) 보편적 사랑을 강조하며 동성애를 ‘삭제’하려는 영화평.

  1) <캐롤>의 감상에는 보편적 사랑이야기라는 ‘정당화’가 전혀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영화의 태도와 시각이 전혀 그러한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캐롤과 테레즈의 운명적인 만남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동성애에 관한 정치적 태도를 의식적으로 배제한다. 말하자면, 동성애의 ‘인정 여부’는 감독의 안중에 없다. 그런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동성애도 사랑이란다’ 운운하는 건 <캐롤>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하나마나한 혼잣말이다. 마치 윌 스미스의 <핸콕>를 보고 나서 “비록 흑인이 주인공이지만 보편적인 히어로물이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런 감상은 영화평이 아니라 자기 편견에 관한 고해성사가 될 뿐이다. 다른 헤테로 멜로영화를 보면서 ‘그래, 이것도 보편적 사랑일 뿐이야’라고 정당화해본 적이 있는가? 그래야 할 필요성이라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아니라면 왜 <캐롤>에 대해서 그런 영화평을 늘어놓는가? 정당화를 요구하는 동성애 영화도 많다. 정치적 독법이 필요한 영화도 많다. 하지만 <캐롤>만큼은 절대 아니다. 명시적인 무정치성이야말로 이 영화의 정치적 태도이다.

  2) 더 큰 문제는 동성애를 ‘삭제’하고 보편적 사랑으로 읽으려는 감상이다. 이러한 영화평들은 결국 이 영화의 모든 훌륭한 성취를 외면하게 만든다. 애초에 보편적 사랑 운운하는 것도 웃기지만, 모든 보편성은 잘 그려진 특수성으로부터 나온다. 이 영화가 캐롤과 테레즈의 감정선과 고뇌를 훌륭하게 드러냈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오직 1950년대 레즈비언의 사랑의 조건을 세심하게 포착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랑은 보편적이지만 그 조건은 제각각이다. 제각각의 조건을 탈각시키지 않는 것이 사랑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길이다. 그리고 <캐롤>은 매우 훌륭하게, 그러나 오버하지 않고, 이를 묘사한다. 그러니 동성애는 ‘불편’하니 그저 보편적 사랑이야기로만 읽겠다는 관객은 이 영화의 모든 훌륭한 점을 오독하고 있는 것이다. <오만과 편견>에서 16세기 영국을 지우거나 <타이타닉>에서 19세기의 계급성을 지우려는 시도나 얼마나 허망한 것일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런 이야기들은 <캐롤>의 감상과 무관한 시민적 기본교양에 속하는 것이다. 하나마나한 이야기 대신에 <캐롤>에 관하여 다음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1) 우유부단하고 나약해보이던 테레즈의 의외의 결단의 순간들에 대하여(그리고 변화의 원동력이 사랑에 대하여) 2) ‘표면적으로는’ 캐롤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둘 사이의 권력관계에 대하여 3) 지극히 무신경하고 도무지 인정할 줄 모르는 <캐롤>의 남자들에 대하여(그리고 <캐롤>과 역-벡델테스트) 4) 흐릿한 유리와 거울을 통해 상대방을 보는 장면들에 대하여 5) LP샵에서의 레즈비언 커플의 의미에 대하여 6) 수미쌍관식 구성의 탁월함에 대하여 7) 홈파티에서 테레즈의 시선을 끌던 여성과의 대화에 대하여(테레즈의 개안?) 8) 그리고 몹시도 훌륭했던 OST의 활용! 기타등등 기타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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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da Candy

놀이 2015.12.16 00:26

 

갑작스런 세이두앓이

레아 세이두의 매력은... 그냥 보면 안다. 프라다 캔디 커머셜 시리즈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EP02. 레아 세이두를 너무나 사랑스럽게 그렸다. 얄미울 정도로 사랑스러운 얼굴과 지극히 차갑고 냉소적인 얼굴의 공존이야말로 세이두의 매력.

다시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어졌다. 중국어는 탕웨이의 결혼으로 좌절됐지만, 어서 더 늦기 전에 프랑스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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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랍스터>

놀이/영화 2015.12.16 00:15

사랑과 인생에 관한 알레고리로 가득한 영화, <더 랍스터>를 봤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힐 알레고리들.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도,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로도, 심지어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겠다. 나는 (평범하게도) 사랑에 대한 냉소로 읽었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기껏해야 카드 뒤집기 게임처럼 얼떨결에 짝을 맞춰가는 것. 혹은 모두를(자신을 포함하여) 속여가며 평생을 연기하는 것.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고 서로에게 총질할 수도 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부분이 다르단 걸 확인하는 순간 짜게 식어버리고 마는 것. 서로에게 감정을 강요하며 거대한 사기에 동참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

 

그럼에도, 사랑이 오고야 마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정작 사랑을 찾을 때엔 없다가,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척 하는 것보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하는 게 더 어려움을 절실히 깨달을 정도로 도저히 오지 않다가, 마침내 모든 것을 체념하고 탈주하는 순간 덥썩 나타나버리고 마는 것을, 우리가 어찌할 수 있을까.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정신줄 놓고 사랑하게 만드는 그 아찔한 충동을 어떡하면 좋을까.

 

콜린 파렐의 찌질한 어색함은 이 영화에서도 돋보였다. 하지만 레아 세이두나는 레아 세이두를 리더로 따를 수 있다면 일생을 옆에서 동료로 단지 지켜만 보면서 가슴 아프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레아 세이두가 무덤을 파고 들어가고 시키면 바로 그 자리에 기쁜 마음으로 눕겠다. 그 차가운 단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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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가 더 랍스터 보고 느낀 것들이랑 비슷해서 되게 신기하네요..! 잘 보고 갑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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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기원2: 후쿠시마의 바람>

2015 서울국제공연예술제 at 아르코예술극장소극장

2015.10.02 () 20:00
2015.10.03 () 15:00, 20:00
2015.10.04 (
) 15:00, 19:00
2015.10.05 (
) 20:00

http://spaf.or.kr/2015/program/prgm_view.php?reg_gb=ARTMLT20&art_no=321

# 최근 공연을 두 편 연달아 보았습니다. 하나는 매우 감각적인 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매우 지적인 연극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 중 후자에 대한 짧은 리뷰입니다.

 

 편의점과 발전소는 공통점이 많지

 

넓게 퍼져 앉은 관객들 틈 속에서 다섯 명의 인물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말은 때로는 서로를, 때로는 자신을, 또 때로는 관객을 향합니다. TV를 돌리다 우연히 중간부터 보게 된 다큐멘터리처럼, 관객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호기심 있게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바로 후쿠시마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고 있습니다.

 

바다를 보러 떠난 아이와 소극적인 성격의 아저씨, 후쿠시마를 보도하려는 기자, 정당화하려는 과학자, 그리고 교수의 강연. 처음에는 각자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각 이야기 사이의 고리가 하나 둘 드러납니다. 어떤 고리들은 극적으로, 또 어떤 고리들은 암시적으로만 제시될 뿐이고, 도저히 알아채기 어려운 고리들을 채워 넣는 것은 관객의 몫이 됩니다.

 

그리고 그 고리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같은 이야기가 맥락을 조금씩 달리하며 반복됩니다. 부부의 아리송한 술자리 퀴즈는 거대한 철학적 의문이 되고, 아이의 알레고리는 강연의 교훈으로 이어집니다. 기우제와 튜링테스트, 지진의 역사와 후쿠시마는 인간의 맹목이라는 하나의 교훈을 드러내기 위한 다른 접근일 뿐입니다. 그렇게 여러 이야기가 비슷한 듯 다르게 관객의 인식 안에서 확대되고 재해석되는 과정은 이 지적인 드라마의 가장 큰 재미입니다. 그에 비하면 다소 웅변적으로 표현되는 운동적 교훈은 오히려 단지 표면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린 결정을 하는 사람이야

미래를 저당잡아 현재를 모면하려는 거야. 그게 너희들이 말하는 최선이라고…!!”

 

건조하고 이성적으로 흘러가던 논의는 기자와 과학자의 논쟁의 대목에서 한 순간 감정적인 개인사로 분출됩니다. 개별적인 소개는 이제 끝났다는 듯이 갑작스레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큰 물줄기로 바뀌면서 관객에게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킵니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대사 한 번 놓치지 않아야 따라갈 수 있는 줄거리이지만, 일단 따라가게 되면 그 울림은 상당합니다. 쏘아붙이는 대사가 꼬리를 이어 여러 방향에서 오갈 때, 우리도 어쨌든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는 새로운 공간활용이 주는 몇 가지 장점 중 하나입니다. 관객은 자신이 감정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앉아있다고 느낍니다. 다소 어렵고 지적인 연극에서 강제로 관객을 몰입시키는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관객과의 접점이 커진 만큼 등장인물들 사이의 소통은 고도로 절제된다는 점입니다. 인물들은 서로 극중에 같이 있을 때조차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먼산을, 관객을, 어둠을 바라보게 됩니다. 모든 무대장치를 음향과 상상력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관객의 시야에는 각각 독립적인 장면장면이 개별적으로 인식됩니다..

 

새로운 공간활용의 또 다른 장점은 교수의 강연씬입니다. 교수의 강연씬은 다른 모든 이야기들과 다소 동떨어져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일반적 무대구성이었다면 어색하고 이질적인 설명조로 들렸을 이야기도 공간활용으로 인해 자연스러워집니다. , 관객들은 연극의 관객이자 동시에 강연장의 관객이 되어 자연스럽게 강연의 배경에 녹아들게 됩니다.

 

근거율에는 근거가 없다

 

결국 맹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적이면서도 감상적인 이 이야기의 결론은 인간은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쯤 우리는 교훈을 얻게 될까요? 언제쯤 근거 없는 믿음에서 벗어나 책임질 수 있는 결정을 하게 될까요?

적어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후쿠시마 정도의 대재앙으로도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WRITTEN BY
moonwon
moonw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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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티스토리에 가입하고 블로그를 운영해보고싶은데 혹시 초대장 남는거있으시면

    mkmk4473@naver.com 으로 한장만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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