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일상'에 해당하는 글 18건

지하 산책

사랑/일상 2018.07.09 15:25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소공동 지하를 걷는다. 회사 앞 지하상가로 들어가면 시청역, 을지로입구를 거쳐 동대문까지 갈 수 있는 지하 산책로가 있다. 신 대법관님이 소개해 준 산책길이니, 대법관 루트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보았다. 대법관 루트를 걷다보면 적당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더운 구간과 시원한 구간이 있으며, 길이 넓어지기도 좁아지기도 하고, 시선을 끄는 구경거리도 있다. 계속 걷다보면 심지어 오솔오솔 바람이 부는 듯한 착각도 든다.

어제도 문 닫힌 지하 상점가를 잠시 걸었다. 정처없이 걷다보면 흘러간 대화를 곱씹게 된다. 사이비 교주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광신도의 자질을 타고난 것 아닐까. 무엇에든 뛰어들어 맹신할 준비가 되어있었으나 결국 그럴싸한 교주를 만나지 못한 삶. 실패한 광신도에게는 허무한 시간뿐이다. 세속주의, 합리주의, 무신론를 자주 입에 올리지만, 내심 누구보다 신비주의에 강렬하게 끌린다는 사실은 말하지 못할 비밀이다.

언젠가 그 사람과 즐겨가던 공원의 벤치에 가만히 앉아보았다. 그리운 마음이 파도소리처럼 밀려왔다. 의지할 신 하나 없는 내가 무언가를 믿는 일에 가장 가까운 마음을 가졌던 것은 그 사람이었다. 신을 갖지 못하는 나약한 정신에 비춘 한 줄기의 빛. 그러니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은 얼마간은 영적인 고양감이나 경외감에 가까웠다. 하얀 어둠을 걷는 동안은 허무할 겨를이 없다. 그 위태롭고 아슬아슬하던 날들이 돌이켜보면 가장 은혜로웠다.

해를 보지 못하고 걸으니 지루한 생각뿐이다. 지하산책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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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는 나이. 작은 힌트 하나에도 들떴다가, 이내 깊이 가라앉는다. 좋은 인연을 찾기란 정말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지만, 물론 거짓말이다. 나는 두 시간만 함께 대화를 나누어도, 깊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어느 정도는 사랑하고 있는 것만 같다. 누구에게서건 매력을 찾을 수 있다. 사랑에는 애초에 매력이 필요 없는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진 것 같은 기분. 기분을 흉내내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어제는 호기심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오늘은 얼빠인 것 같다고 말했다. 언젠가는 열정이라고, 또 언젠가는 경외감이라고 말했다. 어느 쪽일까? 사실 어느 쪽도 아니다. 이상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쨌거나 종종 안기고 싶은 것이 생긴다.

올드패션드. 사제락. 러스티네일. 그런 것들을 마시면서 한껏 허세를 부린다. 다 잘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부끄러워한다. 그런 것들을 알아챈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멀어질지도 모른다. 언제나 잡아주길 기대하지만, 누구도 선뜻 발을 떼지 못한다.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는 나이. 나는 죽어서도 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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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봤다

사랑/일상 2018.01.16 18:14

ㅎ선배의 이야기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녹두호프에서 청춘을 허비한 밤이었다. 막차가 끊어지자 ㅎ선배는 인학실(인문대 학생회실)에서 밤을 보내기로 결심하고 학교로 올라왔다. 운동권 소굴이던 인학실에는 밤샘 작업을 위한 낡은 2층침대가 있었으니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문제는 ‘공식적으로는’ 12시 이후에 학교 건물에 출입할 수가 없게 되어 있어서 자동문이 모두 잠긴다는 점이었다.

 

당시 인학실은 인문대 3동에 있었다. 인문대 건물은 언덕을 따라 8개동으로 지어져 있었는데, 앞동은 문학계열, 뒷동은 사철계열이었다. 중간쯤에 위치한 3동도 언덕을 깎아가며 지었기 때문에 전면은 평지였지만 후면은 2층까지 대지가 솟아있었다. 후면 언덕에서 3동 2층 뒷문으로는 구름다리가 하나 연결되어 있었는데, 바로 이 뒷문 옆이 인학실이었다. ㅎ선배는 구름다리 옆 창문을 타고 인학실에 침입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구름다리 바로 옆 창문은 방범용 창살로 막아놓았기 때문에, 창문 4개 넓이만큼은 창틀을 잡고 건너가야 했다. 고작 2층이니 때문에 떨어진다고 죽기야 하겠냐마는, 그래도 다리 하나쯤은 부러질 수 있는 높이였다. 그러나 술에 적당히 취한 ㅎ선배에게는 알 수 없는 용기가 샘솟아 창틀을 붙잡고 아슬아슬한 곡예를 시작했다. 의외로 간단했다. 창살이 없는 창에 도착하자 ㅎ선배는 창을 열고 인학실 안쪽을 둘러봤다.

 

으악!

 

ㅎ선배의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았다. 어두운 인학실 내부에 머리 하나가 동동 떠서 ㅎ선배와 눈을 마주쳤기 때문이다. 뭐야, 귀신인가? 술때문에 헛것이 보이나? 하마터면 뒤로 자빠져 다리를 부러뜨릴 뻔한 ㅎ선배가 정신을 가다듬고 어둠 속 얼굴을 바라보자 희미한 형상이 점차 또렷해졌다.

 

벽에 걸린 박종철 열사의 영정이었다.

 

==

 

원체 입담이 좋던 ㅎ선배였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1학년 어느 학회 술자리에서였는데, 그 후로 인학실에 들어갈 때마다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박종철이라는 이름을 들어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기 딱 10달 전인 1987년 1월, 고작 22살이던 언어학과 3학년이 남영동으로 끌려가 물고문으로 죽었고, ‘탁 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며 민주화를 촉발시켰다는 그 무거운 사건보다는, 택시비 아끼려다가 박종철 선배 따라갈 뻔 했다던 ㅎ선배의 농담이 나에겐 더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1987>을 보고 난 후, 영정의 이미지로만 남은 박종철 열사에 대해서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변변치도 않은 인물인 선배 하나 지키겠다고 물고문을 당하다가 피워보지도 못한 스물둘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나는 벌써 서른이 넘었지만, 그런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에도 졸업식 시즌에는 박종철 열사 추모비에 꽃을 놓는 사람들이 있을까. 영정 사진으로밖에 만난 적 없는 박종철 선배가 나만큼 살았더라면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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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사랑/일상 2017.12.01 18:41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유리문을 밀고 나가면서 잠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로 로스쿨에서의 마지막 학기시험이 끝났다. “무사히 수료는 하겠네” 농담처럼 말했지만, 어쨌든 나도 무사히 수료는 하게 되었다.

 

지난 3년을 돌이켜보면 대체로 즐거웠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다. 지치거나 외로운 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더 많은 날들은 잔잔하게 지나갔다. 그런 잔잔한 일상이 모여서 행복을 이루는 거라고 믿고 싶다. 이제 학교를 떠나도 매일매일을 잔잔하게 잘 살아내야지.

 

그래서 요즘에는 졸업 이후의 삶에 대해서 종종 생각해 본다. 숭고함을 간직하고 살아가기는 어려운 세상이다. ‘일단 학자금부터 갚고’라고 습관처럼 말했다. 대단치도 않은 빚이지만, 로펌행의 핑계로는 제격이다. 핑계마저 다 떨어지면 무슨 말로 나의 인생을 변명해야 할까.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데도 자꾸만 변명을 되뇌이는 건 스스로의 결정에 확신이 없어서일까.

 

온 힘을 다해 몰입할 수 있는 일생의 과업을 찾고 싶다.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하고 나서기엔 절대선에 대한 확신이 없다. 이제는 모든 주장에 일장일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양비론의 대가가 되었다. 어느 법학자는 행정행위의 공정력을 부정하는 것이 일생의 과업이라고 말했다던데. 그러나 당연히 국민의 권리신장처럼 보이는 이론조차 공동체적 관점에서 부당할 수 있다. 순진무구한 선행이 생각치 못한 피해를 끼치는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다.

 

지구에 위해를 가하지 않으면서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일을 하고 싶다. 음악, 학문, 저술, 산책, 요가, 뭐 그런 것. 한마디로 놈팡이로 놀고먹고 싶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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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사랑/일상 2017.08.20 16:55

돈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을 멀리할 필요는 없지. 그건 그냥 솔직한 거니까. 사람이 너무 돈돈 해대면 피곤할 수는 있지. 그래도 돈은 결국 가치잖아. 가치를 원한다는 말에는 아무런 악의가 없지. 오히려 조심해야 하는 사람은 돈을 안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닐까. 아마도 돈에 미친 사람일 테니까.

 

그래도 말이야, 그냥 침묵하는 편이 나은 말들이 있지.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은 사정이 있지. 잘생기고 예쁜 얼굴 싫어하는 사람 아무도 없지만, 하루종일 거울만 보고 있다면 그건 건강하지 않은 거잖아. 어쨌든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지.

 

그냥 모르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 궁금하지도 않았던 일들인데 이제 너무 잘 알게 되는 것 같아서 피곤해. 글쎄.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제 그냥 사는 것 같아서 무서워. 계속 그냥 살아갈 것 같아서 그게 무서워. 무섭다는 생각도 점점 뜸해지는 것 같긴 한데. 맥락맹으로 살고 싶어. 너무 예리한 감각으로 관계를 알아채는 내가 좀 징그러워.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전혀 모르는 세계에 가서 바보로 살고 싶어. 마음껏 오독을 일삼으면서.

 

어제는 문득 구글에서 송선배 사진을 받았어. 사실 요 며칠 송선배 생각을 많이 했어. 세상에는 송선배같은 사람이 부족한데, 점점 나같은 사람만 늘어나는 것 같아. 얼마전에는 나의 대학시절을 농담처럼 말했어. 아무리 그냥 할만큼 하면서 사는거라지만, 그래도 할만큼은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모르겠어. 오늘은 비도 오고, 아직 계절은 여름이고, 나는 아무런 뜻도 세우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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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표절

사랑/일상 2017.07.22 22:12


“그에게는 언제나 대인관계가 순탄했으니, 작은 균열도 생소하여 피로감이 컸다.”

 

지나고 나면 굳이 마음쓸만큼 대단치도 않다. 그렇게 믿고 지냈다. 그런데 비가 많이 왔다. 비가 참 많이 왔고, 비가 많이 또 계속 왔고, 지겹도록 계속 비가 왔다. 비도 참 많이도 오네. 떨어지는 비를 넋놓고 본 날도 있었다. 비가 이렇게 많이 와도 되나. 언제까지 비가 오려나. 이제 비가 그만 그칠 때도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할 즈음에 그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그 후로도 며칠을 비가 그치지 않았다. 칠월이었다.

 

칠월 들어서 책을 세 권 읽었다.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은 아주 좋은 작품과 그저 그런 작품이 섞여있다. <입동>이나 <풍경의 쓸모>는 김애란다운 분위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결혼 이후의 삶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침묵의 미래> 같은 작품은 더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학할배들은 아직도 이런 소설을 파고 있는 모양이다. 김애란이라는 작가가 이 작품으로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한국 문학계의 수치이다.

 

김영하의 <오직 두 사람>도 읽었다. 여전히 김영하식의 작위적 유머는 껄끄럽다. 그런 말장난은 머릿속으로 생각할 때만 재미있다. 등장인물이 입밖으로 꺼내서 말하는 순간 저급한 일본코믹풍이 되어버린다. <최은지와 박인수>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이다.

 

심보선의 새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 글쎄, 나는 이번엔 잘 모르겠다. 새 시집이 나올 때마다 점점 취향에서 멀어져간다.

 

하지만 모두 순전히 개인적인 감상이다. 불만이 많은 계절이니까.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칠월에는 무엇을 읽어도 천국이 아니다. 누구를 만나도 체념뿐이다. ‘예상표절’이라고 했던가. 몇 번인가 새로운 사람을 만났지만, 결국 내가 읽어온 것은 하나의 텍스트가 된다는 기이한 생각을 한다. 선행된 텍스트는 자기복제를 거치면서 비로소 의미가 명료해진다. 비슷한 시간이 반복되기를 예견하고 있었다는 감각. 그러니 순전히 개인적인 이별이다.

 

슬프고 밉지만 마음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다. 남아서 잠시 울다 갈테니 먼저 가셔도 좋다. 나는 고맙다고 해야 할지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아마도, 그동안 정말 좋았다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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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는 진로를 약간 트는 선택을 했다. 나름 의외의 선택일까. 이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로컬한 업무를 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반도 탈출의 길은 더욱 요원하게 되었다. 모순 덩어리의 인간이다. 화려한 성공을 꿈꾸었다가, 스스로의 속물성을 경멸한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아직도 모르겠다. 이제는 핑계도 바닥나고 있다.

 

그럭저럭 평온한 삶이었는데, 요즘 다시 들뜨고 있다.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기뻤다가 우울했다가 한다. 집착했다가 체념했다가 한다. 꿈꾸다가 꿈깼다가 한다. 생각치도 않게 춤을 추러 가게 되었을 때엔 정말 즐거웠다. 동행이 예뻤던 것 아니냐고 한다면 반만 사실이다. 우리는 정말 각자의 춤을 열심히 추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밖에서 음악에 춤출 때 제일 들뜬다. 집에서 이렇게 글쓸 때 가장 침울하다. 하지만 글쓰는 걸 좋아한다고, 시끄러운 술집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에는 하루 종일 지난 술자리의 장면들을 반추하게 된다. 내가 했던 말, 내가 들었던 말, 나와 상관 없이 나왔던 말.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지도 선택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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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동네에 가요. 편한 미소를 지어주세요.


    오랜만에 꿈에서 그 사람을 만났다. 자주 같이 갔던 어느 카페였다. 그 사람은 나를 발견하고는 건너편 두 테이블쯤 앞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놀란 듯 나른한 제스쳐였다. 가까이 앉으라는 말 같기도 하고, 옆에 앉지 말라는 말 같기도 했다. 나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 사람의 지시에 따랐다. 순한 양이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다른 생각을 해볼 겨를이 없었다. 예컨대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라든가, 내가 보았던 경멸의 눈 같은 그런 것.

 

    일어나서 물을 많이 마셨다. 요즘엔 잠에서 깨면 자주 목이 마르다. 무리해서 늦잠을 잔 날에는 도리어 몸이 무거워 일어나기 어렵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간만에 친구들과 옛날 이야기를 즐겁게도 떠들었다. 안그래도 이틀 연속으로 술을 마신 참이다. 전날 밤을 술과 추억팔이로 보냈으니, 그 사람이 떠오른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점점 더 예뻐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 이렇게 간만에 봐도 아름답나요?

 

    그 사람의 입이 움직였지만 멀어서 들리지 않았다. 옆자리로 가고 싶었지만 그 사람이 허락하지 않았다. 내 말도 전해지지 않은 편이 나았다. 그 때의 나라면 큰 소리로 말했을 것이다. 아니면 무턱대고 옆자리로 옮겼을 것이다. 뭐, 누가 보면 어때. 그런 말을 하며 무릎 위로 끌어앉히던 시절이다.

 

    얼마 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진을 찾아보았다. 무심하게 기대어 책을 읽는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이 연극적으로 멋졌다. 나는 왜 그렇게 해야 했을까. 언제나, 끝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른 근거도 없이 우리의 시간이 다시 올 것을 은근히 기대했던 것 같다. 그 후로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나는 잃어버린 낮에 대해서 생각한다. 우리가 나른하거나 무심하게 서로 기대어 비오는 발코니를 바라보고 있었을, 어느 일요일 낮의 서늘한 거실바닥에 대해서 생각한다. 한 번도 없었지만, 언제나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날의 오래된 기억에 대해서 생각한다.

 

    가끔 내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은 건넬 필요가 없다. 모르는 게 나을 답은 듣지 않는 지혜를 배웠다. 그래도 종종 우리가 걷던 그 길을 산책하는 상상을 한다. 우리가 좋아했던 서울의 작은 공원들. 내가 정말 산책과 공원을 좋아했던 건지, 아니면 그저 갈 곳을 몰라 시선이 없는 벤치에 기대어 앉아있고 싶었던 것 뿐인지, 이제는 더욱이 알 길이 없다. 나는 몇년 새 산책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이 되었고, 혼자서는 좀처럼 벤치에 앉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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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iot

사랑/일상 2017.02.25 00:19

그럴 때 답답해진다. 중언부언할 때. 마음을 표현할 어휘가 부족할 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적절히 언어화할 수 없을 때. 내가 쓴 문장이 전혀 내 마음을 포착하지 못해 불만족스러울 때. 쓰다 지우고, 또 쓰다 지운다. 바보같다.

글을 못쓰는 이유는 책을 안읽기 때문이다. 전에는 언제나 무언가를 읽고 싶어하는 편이었다. 활자중독이라는 말도 들었다. 요즘에는 멍때리는 시간이 많다. 글이 눈에 안들어온다는 말의 의미는 재작년쯤에 처음 알았다. 바보가 되고 있다.

언젠가 친구가 글을 잘 쓰는 방법에 대하여 물었을 때, 결국 표현하려는 내용이 좋다면 글도 좋아진다고 대답했었다. 글이 산만하다면 아직 생각이 정리가 안 된거다. 글이 어렵다면 아직 쉽게 설명할 준비가 안된거다. 주장이 또렷하고 근거가 탄탄하다면, 그냥 생각을 이어서 쓰기만 해도 감탄할만한 글이 된다.

그러니 글을 못 쓰는 나는 제대로 사고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봐도 되겠다. 책을 읽지 않으니 바보가 되는 것은 당연하고, 바보가 좋은 글을 쓸 리 없다는 것도 당연하다.

어떤 말을 들었다. 별 것 아닌 말이었다. 그런데 어떤 말은 시간이 지날 수록 뾰족해진다. 그 말을 곱씹을 수록 나는 허탈하고 쓸쓸해졌다. 가볍게 던진 말 사이로 언뜻 보이던 악의. 쓸쓸한 말을 곱씹는 대신 그에 대한 내 감정을 글로 표현해보려고 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깨달은 것은, 나는 아직 그 말에 대하여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바보같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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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산책을 했다.

 

산책하기엔 좋지 않은 계절이다. 따뜻한 날에는 공기가 좋지 않고, 공기가 좋은 날에는 찬바람이 거세다. 요컨대 양자택일이다. 기관지를 희생해서 따뜻한 날을 즐기거나, 추위에 떨면서 기관지를 지키거나. 어제는 간만에 청명하고도 몹시 추운 날이었으므로, 나는 귀와 코가 빨개지도록 산책을 했다. 성북천을 따라서 정릉천까지 갔다. 어느 쪽에도 볼만한 풍경은 많지 않다. 차가운 공기를 잔뜩 마셨으니 결과적으로 기관지를 지키는 선택이었는지도 의문이다.

 

계절이 지나는 동안 몇 가지 선택을 했다. 몇 날을 고민했지만, 돌이켜보면 회사를 옮긴 일은 선택의 축에도 들지 못한다. 이상과 성공, 돈과 명예, 사랑과 꿈, 그런 추상적인 것들 사이에서는 무엇을 골라도 실패한 선택이다. 요컨대 양자택일은 아니다. 그러다 꿈도, 사랑도, 돈도, 명예도 없이 그럭저럭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귀와 코가 빨개지도록 사랑할 수는 없었던 걸까. 성북천을 따라서 정릉천까지 가는 동안, 같은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산책할 때 강의를 들어. 오디오파일로 된 강의. 듣는 둥 마는 둥 귀에다 쑤셔넣다보면 뭐라도 기억이 나겠지. 그렇게 대답하는 나를 바라보던 측은한 눈을 기억한다. 아니면 한심하다는 눈이었을까. 멜론도 끊고, 음악 대신 강의를 들으면서 걷는다는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음악은 자꾸만 듣고싶어지잖아. 좋은 음악일수록. 그런 마음으로 산책할 때마다 나의 세계는 딱 그만큼씩 쪼그라들까. 눈이 보고싶다. 날 한심하게 바라보던 동그란 눈.

 

이사를 가야할까.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걸을 새로운 산책루트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사에는 시간과 비용이 드는 법. 요컨대 양자택일이다. 아니면 절충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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