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해당하는 글 30건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 2016.03.13 01:01


각자의 자리에서 보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마주앉아 다른 풍경을 본다. 두 눈이 한 방향을 향하므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보는 수밖에 없다. 그대의 얼굴 너머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나. 시선이 머무는 방향을 불안한 마음으로 짐작해 본다.

그대의 침묵이 길었다. 대답은 유예하는 쪽이 간편했다. 노래가 달콤해도 몸에서 고기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나의 손은 형편없었지만, 그대는 그림을 탓하지 않았다. 내일은 더 잘하겠지.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든 노트를 덮는다.

봐서. 보고. 그런 유예의 말들은 외로우면서도 놀랍도록 매혹적이다. 그래서 뭐할래, 라고 물으면 나는 뭐든, 이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 봐서와 뭐든. 묘하게 다른 말들이다. 외롭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보는 수밖에 없다. 시선은 처음부터 서로를 향했으나 단 한번 걸음도 맞춰보지 못했으므로. 일단은 마주앉은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면서, 흔들리는 시선을 불안하게 짐작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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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라캉

사랑 2016.03.04 11:33

일주일을 고스란히 당신과 보냈어도, 지난 시간을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헝클어진 내 머리 속을 당신 앞에 늘어놓으면 당신은 나를 혐오할까 더 사랑할까.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젓는 상상만으로도 나는 저릿해진다. 결핍은 나의 힘.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은 초현실적인 느낌이다.

몇 번이고 글을 써보려 했지만, 우리를 묘사하기엔 상징이 부족하다. 당신과, 당신에 대한 나의 견해와, 당신을 그리는 나의 글은 언제나 조금씩 비껴나 있다. 5cm쯤 어긋난 철길을 미끄러지듯 조사를 고치고 어순을 바꾼다. 그러나 잘못 달린 주석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나는 일부러 체언을 지워 모호한 말을 건넨다. 사랑이란 아름다운 오독의 연속이 아닐까.

한동안 일기를 쓰지 않았다. 흘려보내기엔 소중한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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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로댐

사랑 2015.12.14 02:18



    그녀는 길고 좁다란 도서관 반대쪽 끝에 서 있었다. 그녀는 한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책을 덮고 긴 도서관 통로를 걸어와서는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계속 날 쳐다보고, 나도 계속 당신을 돌아보고 있으니, 서로 이름쯤은 알아야겠네요. 저는 힐러리 로댐인데요. 당신은요?" - 빌 클린턴, 마이라이프


오늘은 긴 밤산책을 했다. 종암경찰서를 지나 개운산을 빙 두르는 산책길이었다. 산등성이를 타고 조성된 산책길을 걸으니 양 옆으로 도시의 야경이 펼쳐졌다. 탁월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 기분전환으로 걷기에는 충분했다. 앞으로 자주 오게 될 것 같다.

산책길을 걸으면서 서울의 작은 공원들에 대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숲이나 선유도공원처럼 대규모 공원 말고, 산책을 즐겨하는 동네 주민들이나 알법한 소박한 공원들 말이다. 서울에서 10년쯤 살고 보니, 동네마다 추천할만한 작은 공원들 한 두개 쯤은 알게 되었다. 굳이 시간내서 찾아갈 가치라고는 전혀 없지만, 식후에 삼십분쯤 산책하기에는 좋은 공원들. 커피 한 잔 들고 벤치에 앉아서 나뭇잎이나 세고 있기 좋은 그런 공원들. 뭐, 그런 공원에 대해서 알고싶어할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의 연인을 은밀히 흠모하는 악취미는 그만두기로 했다. 조연이 주연을 넘보는 순간 극은 엉망이 되는 법이다. 언젠가 나에게도 좋은 작품이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연기나 갈고닦을 일이다. 희극이 올지, 비극이 올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누구나 은밀한 감정을 품고 살아간다. 그 자체로는 흠도 하자도 아니다. 그러나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는 때와 장소, 맥락이 맞아야 한다. 시도때도 없이 감정을 까보이며 시청을 강요하는 것은 바바리맨의 일이다. 감정적 바바리맨. 스릴있고 흥분되겠지.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다.

빌 클린턴의 자서전을 읽었지만, 흥미로운 부분은 힐러리를 만나는 대목 뿐이었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우리나라와 너무나도 달랐다. 클린턴이 열성적인 민주당원으로 대학시절부터 전국 곳곳의 선거판을 얼마나 뛰어다녔는지는 내 삶의 지침을 세우는 데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일은 오바마의 자서전을 읽어보려 했으나.

용산에서 근무중일 때 힐러리 국무장관을 본 적이 있다. 티비로 보던 것보다는 키가 커보였고, 무엇보다 제스쳐가 거침없었다. 힐러리같은 사람과 평생을 사랑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는 빌의 삶을 질투했다. 오바마 방한 때처럼 악수를 청하고 싶었지만, 힐러리는 내 방향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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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사랑 2015.12.12 22:57


도서관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도 볼 수 있는 비온 뒤 낙엽 사진


 

학사거부가 시작된 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소설을 읽고 있다. 지난주에는 거리홍보니 TF니 정신 없었는데, 주말쯤 되니 시간이 남아돌아 할 일이 없었다. 마음이 붕 뜨니 공부할 마음도 안들고 그렇다고 달리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그래서 밀렸던 독서나 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김연수의 장편소설을 하나 빌려왔을 뿐이었는데, 밤새 한 권 읽고는 독서병이 도졌는지 이제 침대 옆에 책을 쌓아놓고 읽고 있다. 오랜만에 마음 놓고 책을 읽는 형편이라 글에 주렸는지, 현재까지는 매일 단행본 1권반 정도 읽는 강행군이다.

 

          오늘도 하루 종일 방에서 책을 읽었다. 유일한 외출은 중앙도서관에 책을 새로 빌리러 다녀온 길이었다. 고대 중도는 일반열람실은 거의 없고 거의 모든 공간이 대출자료실로 사용되고 있는데, 규모가 생각보다 아담해서 책 고르기 좋다. 특정한 책을 검색해가지 않아도 적당히 해당 코너에서 들춰보고 고를 정도는 된다. 특히 한국소설은 4층 코너에 작가 이름순으로 깔끔하게 배치되어 있으니, 교보나 반디 같은 곳에서 책을 고르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다. 서울대 중도에서 책을 빌릴 때에는 미리 청구번호를 알아가지 않으면 한참을 헤매야 했는데 고대에서는 그리도 쉽게 책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고대는 洋書와 國內書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어서 그런 듯 하다. 원서들은 리모델링이 안된 별도의 자료실에 따로 소장되어 있고 일반적인 국내서들만 비치되어 있으니 대형서점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반면 서울대에서는 예컨대 프랑스혁명에 관한 책을 찾으려고 해당 코너에 가면 영어본은 물론이고 프랑스어, 독일어로 된 책에다 세로쓰기의 일서까지 잡다하게 섞여있으니 내가 읽을만한 책은 도리어 찾기 어려웠다. 연구생이 아닌 입장에서야 원서를 본격적으로 읽을 일이 많지 않으니 국내서만 있는 편이 확실히 책 고르기는 좋은 것 같다.

 

          여하간에 오늘은 도서관 김연수 칸에서 철지난 소설을 두 권정도, 트위터로 가끔 소식이나 훔쳐보는 지인의 아버지가 쓴 소설도 한 권, 뜬금없이 궁금해진 빌 클린턴 자서전 1권을 골랐다. 또 매번 읽어보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던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를 집었으나 집에 와서 5페이지쯤 읽고 나서야 몇 년 전쯤에 이미 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말에 좀 힘을 낸다면 아마 월요일 저녁쯤에는 다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살면서 자주 갔던 도서관이 몇 곳 있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왔던 17살 무렵에 즐겨 찾은 성북정보도서관. 꽤 가파른 골목길을 오르면 있는 나름대로 규모 있는 도서관이었다. 지하에 있는 저렴하고 볼품없는 구내식당 정도가 기억에 남아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열심히 무언가 읽으시는 할아버지가 많았다. 소장 중인 책이라고 해봐야 그저 동네 도서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문학과 철학에 대한 나의 기본지식은 이 곳의 책들로부터 만들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도서관에서 보낸 시간들이 결국 내 학부전공까지 결정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장승배기에 있던 동작도서관. 1년 정도 다녔는데, 별다른 기억이 없다. 이삭토스트를 손에 들고 도서관을 향하던 춥고 지겨운 골목길만 생각날 뿐.

 

그리고는 서울대 중앙도서관이다. 이제는 중도라고 해야 할까. 7동에는 三史科 도서관도 있었지만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도서관을 갈 때면 언제나 중도 3열이었다. (졸업할 즈음에는 1열에 더 많이 갔다) 많은 도서관과 구별되는 중도의 특징이라면 칸막이 없이 드넓은 테이블만으로 이루어진 열람실이었다. 다른 도서관에도 대출자료실에는 칸막이 없는 테이블이 드물지 않게 있었지만, 열람실만은 대부분 독서실 칸막이형이었다. 그런데 중도는 큼직한 홀 안에 커다란 테이블만 널찍널찍하게 배치되어 있을 뿐이었으니, 열람실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카페테리아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곳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자면 더러 하품하는 앞 사람과 눈을 마주치기도 했고, 시선을 내리고 공부하는 다른 사람들의 정수리를 보며 자극을 받기도 했다. 테이블이 널찍하니 사람이 적을 때엔 얼마든지 책을 사방에 늘어놓고 공부해도 되었다. 밤에 마감할 시간이 되면 흘러나오는 메시지도 좋았다. 오늘 한 노력이 훗날 많은 이들을 위해 쓰이길 바란다고 했던가.

 

이따금 다른 도서관을 일부러 찾아가곤 했다. 예를 들어 남산도서관이나 정독도서관은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겸해서 공부하러 가기 좋았다. 남산도서관으로 공부하러 갈 때면 커피 한 잔씩 들고 오솔길을 한참을 산책을 했고, 정독도서관에서는 점심 먹으러 나갔다가 밤이 돼서야 가방을 찾으러 도서관에 돌아오기도 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강남도서관, 한양대 법도, 삼성도서관, 그리고 지금의 CJ나 해도까지 여러 도서관에 머물렀지만, 역시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성북도서관과 서울대 중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친구에게 농담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도서관 컨셉의 바bar를 차릴 거라고.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어디 예일이나 옥스포드에 있을 법한 도서관 인테리어를 해두고, 실제로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거다. , 10시가 되면 시간이 다 됐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는데, 모두들 즉시 그 자리에서 책을 치우고 바로 술판을 벌이는 거다. 오늘 읽은 책이 얼마나 흥미롭고 새로웠는지, 내가 그 지식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고 싶은지 서로를 향해 열변을 토하면서. 물론 친구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말은 된다고 생각한다.

 

어서, 이 곳의 도서관에 정을 붙여야 할 텐데. 거의 1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CJ 열람실은 답답하고 해도는 부산스럽고 다른 곳들은 번거롭다. 지난 여름방학에는 주로 해도에서 공부했다. 곧 학사거부가 풀리면 정착할 곳을 찾아봐야 한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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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운 글만 쓰고 있기 싫어서 오늘은 당신에 대해 쓰기로 했다. 붉은색이 어울리는 당신. 꽃처럼 활짝 웃는 당신. 작은 이가 오밀조밀한 당신. 가시 돋힌 말에 거리낌 없는 당신.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을 당신. 오늘도 길가에서 혹시 마주칠까 두리번거리게 하는 당신에 대해서.

  내가 왜 당신을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쓰자면 끝도 없지만, 당신을 왜 내가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쓸 수 없다. 당신에 대해선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당신은 내게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으므로. 말하자면 나는 붉은색을 좋아하고, 활짝 웃는 입에 가슴이 뛰고, 가시 돋힌 말이 매력적이라 생각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부러워하며, 갑작스러운 산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당신은 내게 취미(taste)의 문제이다. 당신은 내 마음 속에만 있다. 오랜 관조 연습으로 나는 몹쓸 취미론을 만들어 온 셈이다.

  당신의 매몰찬 거절이 듣고 싶은 오후_2015.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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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위한 산책

사랑 2015.12.07 02:00



장례식이 끝날 즈음엔 너무 울어서, 걸어 나갈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용케도 심장이 뛰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헌화를 마치고도 한참을 앉아서 선배의 친구들이, 동료들이, 가족들이, 후배들이(나의 선배들이) 헌화하는 길을 지켜보았다. 선배들은 꺼이꺼이 많이도 울었다. 전에도 종종 봤을법한 우는 얼굴. 적어도 그 때는 서로의 등을 두들겨줄 정도는 되었다.

장례위원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선배 앞에서 부끄러운 존재였다. 그저 유아적 사고밖에. 이름 석자 오직 선배만을 위해서 할 수 있었을 것을, 자신에게 떳떳하지 않다느니, 부끄러운 이름이라느니, 개소리를 변명처럼 지껄여댔다. 고맙다는 편지를 뒤늦게라도 부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때로는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이루고자 했던 무엇도 달성하지 못했고, 모든 면에서 철저히 패배하였으며, 내가 건넨 모든 말이 나의 말로 번복되었다는 생각. 나는 사랑도 동지도 잃고 철저히 혼자 남겨졌으며, 그리하여 내 삶으로 의미를 남긴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내가 내일 사라지고 나면 어느 문자도 날 기록하지 않으리라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면서 또 산책을 나선다. 생존을 위한 산책이다. 그저 바닥에 한 발씩 내딛으며 단단한 대지에 안도하는 것 외에는 방황하는 마음을 가눌 길 없다.

내가 서른의 문턱에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나는 내 삶의 주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고작해야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조연이고, 영웅적 서사의 장애물이며, 해피엔딩을 방해하는 악역이다. 그래서 뭐?라고 물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니까. 꺼져버려!라고 하면 미안해...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다. 미안한 조연이라서_ 2015.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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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땅을 보고 걸었다.

며칠 전엔 눈이 세차게 왔다. 언제 이렇게 겨울이 됐나 싶을 만큼. 하얗게 눈이 쌓인 석조건물은 아름답게 빛났다. 몇 번을 보아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너무도 일찍 떠나버린 선배를 생각했다. 선배에게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절망이 깊어도 산책길은 아름답다. 무심한 풍경이다.

같은 길을 걷고 또 걷는다. 걷다보면 생각이 떠오르고 또 걷다보면 생각이 사라진다. 삶이 건조해진 후로 강박적으로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산책만이 내 삶의 촉촉한 순간이다. 같은 길을 걸어도 햇살이 다르고, 색감이 다르고, 그림자가 다르고, 온도가 다르다. 다른 온도의 길을 수 십 번 걷다보면 조금은 안심이 된다. 내가 아무리 흔들려도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선배는 바보같은 웃음이 매력적이었다. 때로는 정색하고 말하는 법도 알았다. 물론 나는 대체로 혼나는 쪽이었다. 하지만 실망스러울 내 결정들에 대해서도 쓴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저 여러 후배들 중 하나라서 대수롭지 않았던 갈까. 나는 비밀스럽게 선배를 몹시 존경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어제는 내내 땅을 보고 걸었다. 평소보다 조금 멀리까지 걸어보기도 했다. 추운 길 함께 걸어준 그 사람에게 고마웠다. 역시 고맙다는 말을 잘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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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사랑 2015.07.28 11:52

 

그 사람이 떠나간 자리에 가만히 앉아보았다. 잔 속 얼음이 바스락 하고 무너졌다. 창밖으로는 진부한 풍경. 내손으로 찢어놓은 영수증을 조각조각 천천히 손에 모았다. 얼그레이가 차가웠다.

언젠가 약속을 말한 일이 있었다. 나란히 흙길을 걸은 날도 있었다. 모래사장이 펼쳐진다던 수풀길 끝에는 검은 진창 뿐이었지만, 와인이 서늘했으므로 마음에 들었다.

느리게 헤엄치는 잉어도 물을 지겨워하는 날이 올까. 그 날도 여름이었다. 거울못에 비친 뜨거운 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리 밑으로 침을 뱉고 싶었다.

삼류 소설쯤은 될 수도 있겠다. 나는 오랜만에 혼자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마스킹이 철저했다. 검은 화면에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한참을 의자에 파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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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6. 30.

사랑/일상 2015.06.30 01:17

# 캐서린 맨스필드를 읽었다. 정말 오랜만에 읽는 비-비문학이다. 중고서점에서 한참을 서성인 결과물 치고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랜 건기에 있는 내 감수성 탓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이, 인생이……."

그녀가 더듬었다. 하지만 인생이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주로 짧은 작품들이 좋았다. 사실 짧을수록 좋았다.

 

# 모두들 그럭저럭 살고 있다. 그 정도면 만족이다. 비록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삶이지만, 다행히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삶이다.

 

# 조금씩 다시 글을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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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대장을 부탁드려요.
    좋은 뉴스를 보고 싶습니다. T - story 에서요. 저는 30대의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정확하고 좋은 뉴스들을 듣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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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향기

사랑 2014.07.06 03:21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름이었다. 나는 당시에 몹시도 좋아했던 두 선배, 그리고 그럭저럭 가깝다고 생각하던 한 동기와 함께 홋카이도로 여행을 떠났다. 또래끼리 나선 첫 해외여행이었다. 여행의 일정 계획부터 숙소 예약까지 모두 직접 한 것도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엉성한 계획이었고, 미숙한 탓에 더 싸게 갈 기회를 많이 놓쳤다.) 티벳으로 혼자 배낭여행을 다녀온 게 불과 몇 달 전이었으니, 어쨌든 나는 나름대로 능숙한 여행객의 풍모를 보이고 싶어했다. 여유가 곧 어른스러움이자 남자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꽤나 이상적인 조합이었다. 원어민에 가까운 일본어 실력자가 1명, 서브문화 덕후도 1명. 그리고 누구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실 내가 여행 내내 날카롭게 의식한 것은 1대1의 성비였다. 나는 여선배들을 잘 따르는 편이었고, 또 여선배들은 나름대로 나를 귀여워했다. 그 선배들과 낯선 곳으로 열흘가량 여행을 떠난다. 대단한 로맨스를 기대하지도, 은근한 감정의 교환을 바란 것도 아니었지만, 혹여나 그런 순간이 올 것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뭐 그런 정도의 마음이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모두가 작은 동요도 없이 여행 자체의 즐거움만을 마음껏 만끽하고 돌아왔지만.


  일단 삿포로에 도착하고 나서는 우리는 주로 기차로 이동했다. 고속열차, 완행열차, 야간열차, 전철까지 다양하게도 탔다. 여행은 역시 기차가 낭만적이라는 근거없는 편견 때문이었지만, 여행객을 위한 JR패스가 저렴하다는 실용적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 일본인과 대화하게 된 것도 무수히 많이 탔던 그 기차들 중 하나에서였다.


  우리가 탄 기차의 좌석은 4석씩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었다. 바로 그런 마주보는 좌석일 것으로 기대하고 미리 예매한 4석은 실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2석씩 일렬로 나뉘어 있었고, 결국 나와 내 동기는 모르는 사람과 마주보고 앉아서 4시간을 가야 할 운명이었다. 그렇게 나누어 앉아 출발한지 30분쯤 지났을까, 내내 비어있던 우리 앞좌석에 드디어 승객이 한 명 앉았다.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일본 여자였다.


  그 사람이 20대 여자가 아니라 40대 남자였다면, 60대 할머니였다면, 혹은 10살 먹은 어린아이였더라도 내가 말을 걸었을까?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예쁘장하게 생긴 20대 여자였다는 점이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고 말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멍하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 사람에게 나는 문득 ‘헬로-’ 영어로 인사를 건넸고, 그 사람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그러나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하이-’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영어였는지, 아니면 일본어였는지는 모르겠다.


  그건 말하자면 여행객만이 가질 수 있는 뻔뻔함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름을 묻고, 또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인지를 묻고, 우리나 한국에서 온 대학생이며 홋카이도를 처음 여행하고 있다고 붙임성 있게 대화를 걸었다. 영어와 일본어, 한국어와 손짓을 섞어가면서 나눈 대화를 통해 내가 대략적으로 알게된 사실은, 그 사람이 24살이며, 미용업에 종사하고 있고, 지금 친구를 만나서 놀다가 할머니댁에 가고 있다거나 하는, 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시시콜콜한 신상정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보는 낯선 이방인과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머지 별 것 아닌 대화에도 몹시도 신나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대화한 것만으로 수년간 교류했던 친구처럼 가깝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그 뿐임을 알았다. 어차피 기차에서 내리고 나면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운명이었고, 이를 서글퍼할 것도 아니었다. 도착지가 가까워오자 머뭇거리던 그 사람은, 문득 결심한 듯 친구와 찍은 스티커사진을 한 장 지갑에서 나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기억해달라는 의미였을까. 나는 내가 가진 유일한 사진이었던 증명사진을 건넸다. 여권 분실에 대비해 가져온 예비분이었는데, 여권용 증명사진이 모두 그렇듯 대단히 못난 사진이었다. 대단히. 그렇게 그 사람은 아쉬운 표정으로 목적지에 도착해 먼저 내렸고, 우리는 삼십분인가를 더 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 후로 나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무턱대고 대화를 걸었다. 하노이행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게 된 베트남인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이었는데, 6시간 가량의 비행시간 동안 ‘배고파요’ ‘화장실 어디에요’ ‘당신 참 예쁘네요’ 와 같은 생존베트남어(?)를 가르쳐주었다. 캄보디아 국경을 넘는 버스에서는 노란 머리의 일본인 배낭여행객과 금세 친해져서는 페이스북 친구가 되었다. (물론 서로 가끔 어색하게 좋아요만 누를 뿐 다른 어떠한 교류도 하지 않는다.) 미얀마에 가는 동안 알게 된 어느 사업가 아저씨는 자기 집으로 초대해 맛있는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그런 식이었다. 여행객이 말을 걸어올 때 열린 마음으로 대하게 되는 것은 만국 공통의 에티켓이었다. 여행의 즐거움이란 어쩌면 여행객만이 가질 수 있는 적극성과 뻔뻔함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나는 무엇보다도 여행객이라는 지위를 남용하는 일이 즐거웠다.


  지난 목요일, 오랜 여행 끝에 한국에 돌아온 지인을 만났다. 외국물이 하나도 빠지지 않아 에스닉한 분위기의 그 사람에게서 여행자의 향기가 났다. 내가 무척이나 그리워하뎐 향이었다. 사람들이 자유로움 따위의 어려운 말로 설명하곤 하는, 그리고 내가 여행자의 뻔뻔함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향. 나는 내가 얼마나 근사하게도 나를 기만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지난 날의 기억과 다짐은 모두 잊고 괘씸하게도 근사한 속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타인의 시선으로밖에 꿈을 꿀 줄 모르는 근사한 속물 말이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사람도, 풍경도, 음식도, 음악도 모두 이 세상에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 여행을 사랑해본 자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 소중한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서 기를 쓰고 여행을 떠나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생을 여행으로만 채울 수 없으니, 언제나 여행하는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 매 순간 달라지는 모든 햇살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내 지난 몇 달의 삶의 태도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내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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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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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보람찬 하루 되세요. ^^
  2. 좋은 추억 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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