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해당하는 글 24건

생존을 위한 산책

사랑 2015.12.07 02:00



장례식이 끝날 즈음엔 너무 울어서, 걸어 나갈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용케도 심장이 뛰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헌화를 마치고도 한참을 앉아서 선배의 친구들이, 동료들이, 가족들이, 후배들이(나의 선배들이) 헌화하는 길을 지켜보았다. 선배들은 꺼이꺼이 많이도 울었다. 전에도 종종 봤을법한 우는 얼굴. 적어도 그 때는 서로의 등을 두들겨줄 정도는 되었다.

장례위원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선배 앞에서 부끄러운 존재였다. 그저 유아적 사고밖에. 이름 석자 오직 선배만을 위해서 할 수 있었을 것을, 자신에게 떳떳하지 않다느니, 부끄러운 이름이라느니, 개소리를 변명처럼 지껄여댔다. 고맙다는 편지를 뒤늦게라도 부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때로는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이루고자 했던 무엇도 달성하지 못했고, 모든 면에서 철저히 패배하였으며, 내가 건넨 모든 말이 나의 말로 번복되었다는 생각. 나는 사랑도 동지도 잃고 철저히 혼자 남겨졌으며, 그리하여 내 삶으로 의미를 남긴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내가 내일 사라지고 나면 어느 문자도 날 기록하지 않으리라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면서 또 산책을 나선다. 생존을 위한 산책이다. 그저 바닥에 한 발씩 내딛으며 단단한 대지에 안도하는 것 외에는 방황하는 마음을 가눌 길 없다.

내가 서른의 문턱에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나는 내 삶의 주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고작해야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조연이고, 영웅적 서사의 장애물이며, 해피엔딩을 방해하는 악역이다. 그래서 뭐?라고 물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니까. 꺼져버려!라고 하면 미안해...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다. 미안한 조연이라서_ 2015. 12. 07.


WRITTEN BY
moonwon
moonwon.com

트랙백  0 , 댓글  0개가 달렸습니다.
secret

어제는 땅을 보고 걸었다.

며칠 전엔 눈이 세차게 왔다. 언제 이렇게 겨울이 됐나 싶을 만큼. 하얗게 눈이 쌓인 석조건물은 아름답게 빛났다. 몇 번을 보아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너무도 일찍 떠나버린 선배를 생각했다. 선배에게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절망이 깊어도 산책길은 아름답다. 무심한 풍경이다.

같은 길을 걷고 또 걷는다. 걷다보면 생각이 떠오르고 또 걷다보면 생각이 사라진다. 삶이 건조해진 후로 강박적으로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산책만이 내 삶의 촉촉한 순간이다. 같은 길을 걸어도 햇살이 다르고, 색감이 다르고, 그림자가 다르고, 온도가 다르다. 다른 온도의 길을 수 십 번 걷다보면 조금은 안심이 된다. 내가 아무리 흔들려도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선배는 바보같은 웃음이 매력적이었다. 때로는 정색하고 말하는 법도 알았다. 물론 나는 대체로 혼나는 쪽이었다. 하지만 실망스러울 내 결정들에 대해서도 쓴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저 여러 후배들 중 하나라서 대수롭지 않았던 갈까. 나는 비밀스럽게 선배를 몹시 존경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어제는 내내 땅을 보고 걸었다. 평소보다 조금 멀리까지 걸어보기도 했다. 추운 길 함께 걸어준 그 사람에게 고마웠다. 역시 고맙다는 말을 잘 하지 못했다.

 


WRITTEN BY
moonwon
moonwon.com

트랙백  0 , 댓글  0개가 달렸습니다.
secret

카페에서

사랑 2015.07.28 11:52

 

그 사람이 떠나간 자리에 가만히 앉아보았다. 잔 속 얼음이 바스락 하고 무너졌다. 창밖으로는 진부한 풍경. 내손으로 찢어놓은 영수증을 조각조각 천천히 손에 모았다. 얼그레이가 차가웠다.

언젠가 약속을 말한 일이 있었다. 나란히 흙길을 걸은 날도 있었다. 모래사장이 펼쳐진다던 수풀길 끝에는 검은 진창 뿐이었지만, 와인이 서늘했으므로 마음에 들었다.

느리게 헤엄치는 잉어도 물을 지겨워하는 날이 올까. 그 날도 여름이었다. 거울못에 비친 뜨거운 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리 밑으로 침을 뱉고 싶었다.

삼류 소설쯤은 될 수도 있겠다. 나는 오랜만에 혼자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마스킹이 철저했다. 검은 화면에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한참을 의자에 파묻혀 있었다.


WRITTEN BY
moonwon
moonwon.com

트랙백  0 , 댓글  0개가 달렸습니다.
secret

2015. 06. 30.

사랑/일상 2015.06.30 01:17

# 캐서린 맨스필드를 읽었다. 정말 오랜만에 읽는 비-비문학이다. 중고서점에서 한참을 서성인 결과물 치고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랜 건기에 있는 내 감수성 탓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이, 인생이……."

그녀가 더듬었다. 하지만 인생이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주로 짧은 작품들이 좋았다. 사실 짧을수록 좋았다.

 

# 모두들 그럭저럭 살고 있다. 그 정도면 만족이다. 비록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삶이지만, 다행히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삶이다.

 

# 조금씩 다시 글을 써야지.


WRITTEN BY
moonwon
moonwon.com

트랙백  0 , 댓글  1개가 달렸습니다.
  1. 초대장을 부탁드려요.
    좋은 뉴스를 보고 싶습니다. T - story 에서요. 저는 30대의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정확하고 좋은 뉴스들을 듣기 원합니다.
secret

여행자의 향기

사랑 2014.07.06 03:21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름이었다. 나는 당시에 몹시도 좋아했던 두 선배, 그리고 그럭저럭 가깝다고 생각하던 한 동기와 함께 홋카이도로 여행을 떠났다. 또래끼리 나선 첫 해외여행이었다. 여행의 일정 계획부터 숙소 예약까지 모두 직접 한 것도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엉성한 계획이었고, 미숙한 탓에 더 싸게 갈 기회를 많이 놓쳤다.) 티벳으로 혼자 배낭여행을 다녀온 게 불과 몇 달 전이었으니, 어쨌든 나는 나름대로 능숙한 여행객의 풍모를 보이고 싶어했다. 여유가 곧 어른스러움이자 남자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꽤나 이상적인 조합이었다. 원어민에 가까운 일본어 실력자가 1명, 서브문화 덕후도 1명. 그리고 누구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실 내가 여행 내내 날카롭게 의식한 것은 1대1의 성비였다. 나는 여선배들을 잘 따르는 편이었고, 또 여선배들은 나름대로 나를 귀여워했다. 그 선배들과 낯선 곳으로 열흘가량 여행을 떠난다. 대단한 로맨스를 기대하지도, 은근한 감정의 교환을 바란 것도 아니었지만, 혹여나 그런 순간이 올 것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뭐 그런 정도의 마음이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모두가 작은 동요도 없이 여행 자체의 즐거움만을 마음껏 만끽하고 돌아왔지만.


  일단 삿포로에 도착하고 나서는 우리는 주로 기차로 이동했다. 고속열차, 완행열차, 야간열차, 전철까지 다양하게도 탔다. 여행은 역시 기차가 낭만적이라는 근거없는 편견 때문이었지만, 여행객을 위한 JR패스가 저렴하다는 실용적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 일본인과 대화하게 된 것도 무수히 많이 탔던 그 기차들 중 하나에서였다.


  우리가 탄 기차의 좌석은 4석씩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었다. 바로 그런 마주보는 좌석일 것으로 기대하고 미리 예매한 4석은 실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2석씩 일렬로 나뉘어 있었고, 결국 나와 내 동기는 모르는 사람과 마주보고 앉아서 4시간을 가야 할 운명이었다. 그렇게 나누어 앉아 출발한지 30분쯤 지났을까, 내내 비어있던 우리 앞좌석에 드디어 승객이 한 명 앉았다.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일본 여자였다.


  그 사람이 20대 여자가 아니라 40대 남자였다면, 60대 할머니였다면, 혹은 10살 먹은 어린아이였더라도 내가 말을 걸었을까?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예쁘장하게 생긴 20대 여자였다는 점이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고 말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멍하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 사람에게 나는 문득 ‘헬로-’ 영어로 인사를 건넸고, 그 사람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그러나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하이-’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영어였는지, 아니면 일본어였는지는 모르겠다.


  그건 말하자면 여행객만이 가질 수 있는 뻔뻔함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름을 묻고, 또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인지를 묻고, 우리나 한국에서 온 대학생이며 홋카이도를 처음 여행하고 있다고 붙임성 있게 대화를 걸었다. 영어와 일본어, 한국어와 손짓을 섞어가면서 나눈 대화를 통해 내가 대략적으로 알게된 사실은, 그 사람이 24살이며, 미용업에 종사하고 있고, 지금 친구를 만나서 놀다가 할머니댁에 가고 있다거나 하는, 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시시콜콜한 신상정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보는 낯선 이방인과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머지 별 것 아닌 대화에도 몹시도 신나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대화한 것만으로 수년간 교류했던 친구처럼 가깝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그 뿐임을 알았다. 어차피 기차에서 내리고 나면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운명이었고, 이를 서글퍼할 것도 아니었다. 도착지가 가까워오자 머뭇거리던 그 사람은, 문득 결심한 듯 친구와 찍은 스티커사진을 한 장 지갑에서 나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기억해달라는 의미였을까. 나는 내가 가진 유일한 사진이었던 증명사진을 건넸다. 여권 분실에 대비해 가져온 예비분이었는데, 여권용 증명사진이 모두 그렇듯 대단히 못난 사진이었다. 대단히. 그렇게 그 사람은 아쉬운 표정으로 목적지에 도착해 먼저 내렸고, 우리는 삼십분인가를 더 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 후로 나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무턱대고 대화를 걸었다. 하노이행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게 된 베트남인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이었는데, 6시간 가량의 비행시간 동안 ‘배고파요’ ‘화장실 어디에요’ ‘당신 참 예쁘네요’ 와 같은 생존베트남어(?)를 가르쳐주었다. 캄보디아 국경을 넘는 버스에서는 노란 머리의 일본인 배낭여행객과 금세 친해져서는 페이스북 친구가 되었다. (물론 서로 가끔 어색하게 좋아요만 누를 뿐 다른 어떠한 교류도 하지 않는다.) 미얀마에 가는 동안 알게 된 어느 사업가 아저씨는 자기 집으로 초대해 맛있는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그런 식이었다. 여행객이 말을 걸어올 때 열린 마음으로 대하게 되는 것은 만국 공통의 에티켓이었다. 여행의 즐거움이란 어쩌면 여행객만이 가질 수 있는 적극성과 뻔뻔함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나는 무엇보다도 여행객이라는 지위를 남용하는 일이 즐거웠다.


  지난 목요일, 오랜 여행 끝에 한국에 돌아온 지인을 만났다. 외국물이 하나도 빠지지 않아 에스닉한 분위기의 그 사람에게서 여행자의 향기가 났다. 내가 무척이나 그리워하뎐 향이었다. 사람들이 자유로움 따위의 어려운 말로 설명하곤 하는, 그리고 내가 여행자의 뻔뻔함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향. 나는 내가 얼마나 근사하게도 나를 기만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지난 날의 기억과 다짐은 모두 잊고 괘씸하게도 근사한 속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타인의 시선으로밖에 꿈을 꿀 줄 모르는 근사한 속물 말이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사람도, 풍경도, 음식도, 음악도 모두 이 세상에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 여행을 사랑해본 자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 소중한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서 기를 쓰고 여행을 떠나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생을 여행으로만 채울 수 없으니, 언제나 여행하는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 매 순간 달라지는 모든 햇살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내 지난 몇 달의 삶의 태도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내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_


WRITTEN BY
moonwon
moonwon.com

트랙백  0 , 댓글  4개가 달렸습니다.
  1.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보람찬 하루 되세요. ^^
  2. 좋은 추억 이네요.
secret

망상의 끝

사랑 2014.06.24 23:45

#

언젠가는 접어둔 책장 귀퉁이를 책임져야 하는 시간이 온다. 번복할 것이 많아서 장황해지고 마는 그런 나이가 온다. 아무리 오랫동안 책을 눌러두어도 접었던 빗금은 말끔해지지 않는다. 나이테처럼 조밀해지는 빗금들 사이로 무엇을 새롭게 새길 수 있나.


몇 개월만에 다시 펼쳐든 시집에 새롭게 몇 개의 귀퉁이를 접고, 너저분하게도 접혀있던 귀퉁이를 펼친다. 어려 번 읽고 또 읽은 글귀들이 낯선 이가 되어 박힌다. 이제 내가 읽은 시에는 온통 그 뿐이다. 다시는 예전에 읽은 시를 떠올릴 수 없다. 그러니 오늘은 무슨 시를 꾹꾹 눌러써야 하나. 아무리 시를 눌러써도 종이는 더러워지기만 하는데. 짐짓 쾌활하게 웃어본들 나의 귀퉁이는 전락을 일삼는데.


#

나는 불완전하게 태어났다. 내 팔은 원래 네 개였는데, 실수로 두 개만 갖고 왔다. 두 팔로 나를 안고 등을 쓸어내리며 괜찮다고, 괜찮다고,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내 팔 어디뒀지.


#

산 자의 시간에는 욕망이 춤춘다. 잊었던 전화번호를 누르고, 떠났던 곳을 다시 찾고, 잃어버린 기억을 곱씹는다. 이름도 모를 주인에게 수작을 걸고, 구부러진 길을 졸졸 따라다니다가, 수치심도 없이 몸짓을 흉내낸다. 우리가 터무니 없는 망상을 하고, 기억을 왜곡하는 것은 산 자의 시간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자의 시간이 반드시 온다. 네온사인도 전봇대도 없는 곳.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면서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시간. 나는 무덤을 여행하고 싶어졌다.


#

방금, 얼렁뚱땅 1학년 1학기가 끝났다. 얼렁뚱땅 결혼하고 싶다.


#

보고싶다는 말은 접어두기로 한다. 어른이 되면, 접어둬야 하는 말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하루에 절반쯤은 천국, 절반쯤은 지옥에 산다. 그러니 행복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한동안은 지옥에만 살아야 한다. 천국을 상상한다고 지옥이 천국이 되나.

가능하면 멀리, 떠나고 싶다. 망상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WRITTEN BY
moonwon
moonwon.com

트랙백  0 , 댓글  0개가 달렸습니다.
secret

새_ 심보선

사랑 2014.05.13 21:28

새 / 심보선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아주 밝거나 아주 어두운 대기에 둘러싸인 채.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달빛을 받아 은회색으로 반짝이는 네 귀에 대고 나는 속삭인다.

너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너는 지금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가.


사랑해. 나는 너에게 연달아 세 번 고백할 수도 있다.

깔깔깔. 그때 웃음소리들은 낙석처럼 너의 표정으로부터 굴러떨어질 수도 있다.

방금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미풍 한 줄기.

잠시 후 그것은 네 얼굴을 전혀 다른 손길로 쓰다듬을 수도 있다.


우리는 만났다. 우리는 여러 번 만났다.

우리는 그보다 더 여러 번 사랑을 나눴다.

지극히 평범한 감정과 초라한 욕망으로 이루어진 사랑을.


나는 안다. 우리가 새를 키웠다면,

우리는 그 새를 아주 우울한 기분으로

오늘 저녁의 창밖으로 날려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웃었을 것이다.

깔깔깔. 그런 이상한 상상을 하면서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우리는 사랑을 나눌 때 서로의 영혼을 동그란 돌처럼 가지고 논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정작 자기 자신의 영혼에는 그토록 진저리치면서.


사랑이 끝나면, 끝나면 너의 손은 흠뻑 젖을 것이다.

방금 태어나 한 줌의 영혼도 깃들지 않은 아기의 살결처럼.

나는 너의 손을 움켜잡는다. 나는 느낀다.

너의 손이 내 손안에서 조금씩 야위어가는 것을.

마치 우리가 한 번도 키우지 않았던 그 자그마한 새처럼.


너는 날아갈 것이다.
날아가지 마.

너는 날아갈 것이다.


///

새를 잡는 시늉도 않는다. 나는 눅눅한 빨래를 개고, 책상을 정리하고, 팔굽혀펴기를 서른 개쯤 하다가, 무표정하게 잠에 든다.

하루 내 미풍은 없었지만, 눅눅한 냄새는 계속 따라온다. 킁킁, 무슨 냄새야. 얼굴을 찌푸리고 걷다가, 냄새의 근원지가 나였음을 깨닫는다. 동그란 돌처럼 갖고 놀다가 생채기가 난다.

민법 469조2항을 소리내 읽으며 겸허해진다. 이해관계없는 제3자는 채무자의 의사에 반하여 변제하지 못한다. 이해관계없는 제3자. 누구도 대신 욕망하지 못한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용기가 필요해

라라라라랄라 라라라랄라랄라 랄랄라라랄라 라라라라라랄라

라라라라랄라 라라라랄라랄라 랄라라라랄라 라라라라라랄라



WRITTEN BY
moonwon
moonwon.com

트랙백  0 , 댓글  0개가 달렸습니다.
secret

201405070122

사랑/일상 2014.05.07 01:22

  생각이 많은 밤이다.


  새로 이사 온 방은 두 면이 통유리다. 방 전체가 대략 직사각형 모양이니 벽의 절반은 유리인 셈이다. 코너 끝 방이라 가능한 구조. 처음 이 방을 보러 왔을 때, 온실같다고 생각했다. 햇살이 가득히 들이치는 방안에서 광합성을 하다보면 나도 조금은 자랄까. 그런 마음으로, 조금은 부담스러운 월세에도 선뜻 계약했다. 창이 난 방향이 동북-동남인 탓에 오전에만 해가 들이치는 것 까지는 생각도 못 했다. 다행히 아침 햇살이 워낙 밝아 기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침대를 창 옆에 바짝 붙였다. 10층인 데다가 주위에 높은 건물이 없어서 커텐도 활짝 걷고 산다. 침대에 누우면 창으로 바로 하늘이 보인다. 누워서 보는 것은 대체로 구름. 가끔 날이 좋은 밤에는 별도 보인다. 그렇게 누워서 아무런 생각 없이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 따위를 보고 있자면, 홀로 우주에 남겨진 기분이다. 아주 고독하고 특별한 우주. 그 우주에는 외로움도, 슬픔도, 질투도, 후회도 없다. 그저 구름만이 무심하게 흐른다. 언젠가 새벽녘에 문득 잠에서 깬 적도 있다. 푸르스름한 하늘에 노랗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색감이 아주 예쁘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중 일요일에는 늦잠을 잘 수 있다. 아주 오랫동안 해를 받을 수 있는 날이다. 햇볕 비추는 매트리스 위를 손으로 훑고 있으면, 햇살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온난한 감각을 즐기다가, 괜히 옷을 벗고 광합성에 나서기도 한다. 나신으로 햇살을 받는 행위에는 간단히 표현하기 어려운 기묘한 야릇함이 있다.


  지난 주말에 첫 소장을 썼다. 수업 과제로 써본 것이지만, 상담기록과 등기부, 계약서 등 제시된 자료를 바탕으로 쓰는 기록형 과제라서 정말 소송을 시작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쓸 수 있었다. 법 실력이 미천한 탓에 터무니 없는 주장을 많이 넣긴 했지만, 교과서에 흩어져 있는 단서들을 모아 추리를 완성해 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완성된 소장이 형편없어서 마음이 안좋긴 했다. 내가 누군가를 대리한다면 이런 수준으로는 안된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나를 믿어준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기분은 참을 수 없다. 신뢰는,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고독하고 특별한 우주에 홀로 누워 판례를 읽고, 잦은 오류를 책망하다가, 아주 길고 어려운 전화를 한다. 나만의 우주와 교신하는 사무적인 음성은 어느새 눅눅해진다. 눅눅한 전화는 견디기 어렵다. 하지만 전화가 끊기면 내 우주는 끝내 난파하고 마는 것 아닐까. 두렵다. 어제보다 작아진 이 방에서.


  나는 언제부터 방에 집착하게 된 걸까. 몸 누울 자리 하나 없이 방황하는 공포. 너는 내 생각을 궁금해했고, 나는 바보같은 나의 심연을 빨래처럼 널어두었다. 빨래는 역시 눅눅했다. 몹시 부끄러웠다. 


WRITTEN BY
moonwon
moonwon.com

트랙백  0 , 댓글  2개가 달렸습니다.
  1. 비밀댓글입니다
secret

 인간의 감정 주기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군의 과학자들이 여성의 월경 주기에 따른 감정 변화를 연구하기 위해 여성들을 모집해 설문조사를 통해 매일매일의 신체 변화에 따른 감정을 기록하도록 했고, 그렇게 간단히 여성이 월경 주기에 따라 감정 기복을 겪는다는 ‘과학적’ 결론을 도출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성은 감정적 동물이며 이성적 활동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을 실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한 셈이다. 그러나 결론에 불만을 느낀 다른 일군의 과학자들은 이번에는 월경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하지 않은 채 남녀 모두를 대상으로 매일의 감정을 기록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번에도 감정 기복이 주기적으로 나타나기는 했단다. 그런데 맥빠지게도 실험을 통해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주기는 월경주기가 아니라 일주일에 따른 감정기복이었다. 그것도 성별의 차이를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남녀 모두에게서 매우 큰 폭으로. (출전을 모르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그런 취지의 이야기였다.)

  나는, 요즘 수요일마다 우울하다. 월요일 저녁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화요일 저녁에는 우울을 준비하다가, 수요일이 되면 참을 수 없이 침울해진다. 그래서 수요일 저녁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고 돈을 써대고 있지만, 식욕의 충족으로도 우울함을 다 달래기는 어렵다. 마음 편해지는 친구라도 만난다면 좀 나으련만, 수요일에는 왠일인지 다들 바쁜 것 같고 나 자신도 목요일마다 제출하는 과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목요일까지 잔영을 털어버리지 못하면, 일주일 중 4일은 (유사) 우울을 안고 사는 셈이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수요일 6교시마다 듣고 있는 <독문사적강독>에 부담을 느끼고 있을 뿐. 수업 하나가 한 학기를 우울하게 만드는 경험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 번은 좀 심각한 것 같다. 나는 <독문사적강독>때문에 힘들어하다가, 인정사정 안봐주는 교수님을 미워하다가, 다른 수업에서는 독일어 한 글자 가르쳐주지 않은 주제에 난데없이 원서 역사책을 읽어야 졸업시켜준다는 서양사학과가 싫어졌다가, 불문강독 대신 독문강독을 듣게 만든 대학신문을 저주하다가, 제도적 끈끈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쓸데없이 크기만 한 우리 학교가 싫다고 생각했다가, 기초 독일어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보내버린 내 대학시절을 후회하다가, 그런 대학생활을 보내도록 나를 내버려둔(혹은 끌고다닌) 선배들을 비난하다가, 그렇게 결국은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고작 수업 하나 때문에 미워하고 마는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지는 것이다.

  사실 불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니면서, 독어는 내 것이 아니라고 거들떠도 안보는 나도 이상하다. 제대로 공부하면서 따라가면 제법 삶에 도움이 될 법도 한 수업시간이지만, 독어실력을 조금이라도 늘리는 것은 불어에 대한 배반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오늘도 열심히 구글 번역기나 돌리고 있다. sie가 단수인지 복수인지, die가 여성인지 남성인지도 모른 채 그저 눈치통밥으로 찍어가면서. 이런 태도이니 박 교수님이 그렇게 쓴소리 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도 오늘은 독문강독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를 봤다. 주기적 우울이고 뭐고 일단 바르셀로나에 가고 싶어졌다. 바르셀로나에 가면 관계든 진로든 목적이든 뭔가 답을 찾을 수 있겠지. 뭐, 없어도 상관 없다.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


WRITTEN BY
moonwon
moonwon.com

트랙백  0 , 댓글  0개가 달렸습니다.
secret

 나는 아는 척을 참 좋아한다. 음악이나 영화, 문학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 꺼내기를 즐겨한다. 새로 만난 사람들에게는 지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오래 본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적은 양의 지식으로 이야기를 부풀려 하는지 이미 간파하고 있다.

  사실 문화나 예술에 대한 내 지식은 매우 협소한 편인데, 그래서 아는 척을 위한 내 전략은 대부분 훈고학적이다. 평론을 위한 이론이나 참신한 관점이 없기 때문에, 그저 오랫동안 향유한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지식으로 뉴비들에게 어필하는 식이다. 화제가 되고 있는 작가나 영화감독에 대해 “근데 그 사람은 초기작들이 더 좋아”라는 식으로 말하는 거다. 아무래도 잘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 이 사람은 그 작품들을 초기부터 꿰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대단한 전문가라는 인식을 갖게 되지만, 사실은 그저 나이가 많이 들었을 뿐이다. 일개 딜레탕트가 훈고학적 전문성 외에 달리 또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오늘, 갑자기 다시 듣게 된 KEANE의 음악은 내 ‘훈고학적 아는 척’에 최적화 되어 있다. “KEANE은 아무래도 1집이 가장 좋지”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1집이 왜 2집보다 좋은지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 그냥 왠지 그렇게 말하면 전문적인 것처럼 보이니까. 뭐, 1집 수록곡들을 더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다. 2집에서 좋아하는 곡은 두 개. <Run with me>랑 <It’s not true>인데, 둘 다 앨범 전체 분위기에서 보면 좀 우울한 편. 그 중에서 <It’s not true>는 가사를 참 좋아했다. Friends you once loved don’t know you… 밤에 들으면 좋은 우울한 가사들.

  우울하고 비관적인 가사들 끝에 위로의 구절이 나온다. 


그러니 그런 말 하지마 So don’t you say

네 안에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There’s something in your core that can’t be saved

왜냐면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Because it’s not true. 

그리고 내 마음의 모든 가을이 너를 그리워해And every autumn of my heart is missing you


  아, 정말 멋지지 않나? 내 마음의 모든 가을이라니… 너를 그리워하는 내 마음의 모든 가을이라니…


  근데 오늘 다시 가사를 음미하면서 듣다보니 autumn이 아니라 atom이다. 가사집을 찾아보니 역시 atom이 맞단다. 좋아하는 가사 구절에 관한 몇 년 간의 오해가 그렇게 풀렸다. 계절과는 관계 없는 가사를 나는 그렇게도 가을마다 찾아 들었다. 창조적 오역? 

  그래서 나는 계속 autumn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작품이란 작가를 떠나는 순간 감상자가 소유물이 되는 것이기도 하니까. 마음이 허한 가을에 이 노래를 들어야지. 내 마음의 모든 가을이 너를 그리워하는 오늘 밤.


WRITTEN BY
moonwon
moonwon.com

트랙백  0 , 댓글  2개가 달렸습니다.
  1. 한국어로 번역해놓은게 더 멋있네요 ㅋㅋㅋ역시 번역의 왕...?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