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진로를 약간 트는 선택을 했다. 나름 의외의 선택일까. 이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로컬한 업무를 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반도 탈출의 길은 더욱 요원하게 되었다. 모순 덩어리의 인간이다. 화려한 성공을 꿈꾸었다가, 스스로의 속물성을 경멸한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아직도 모르겠다. 이제는 핑계도 바닥나고 있다.

 

그럭저럭 평온한 삶이었는데, 요즘 다시 들뜨고 있다.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기뻤다가 우울했다가 한다. 집착했다가 체념했다가 한다. 꿈꾸다가 꿈깼다가 한다. 생각치도 않게 춤을 추러 가게 되었을 때엔 정말 즐거웠다. 동행이 예뻤던 것 아니냐고 한다면 반만 사실이다. 우리는 정말 각자의 춤을 열심히 추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밖에서 음악에 춤출 때 제일 들뜬다. 집에서 이렇게 글쓸 때 가장 침울하다. 하지만 글쓰는 걸 좋아한다고, 시끄러운 술집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에는 하루 종일 지난 술자리의 장면들을 반추하게 된다. 내가 했던 말, 내가 들었던 말, 나와 상관 없이 나왔던 말.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지도 선택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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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동네에 가요. 편한 미소를 지어주세요.


    오랜만에 꿈에서 그 사람을 만났다. 자주 같이 갔던 어느 카페였다. 그 사람은 나를 발견하고는 건너편 두 테이블쯤 앞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놀란 듯 나른한 제스쳐였다. 가까이 앉으라는 말 같기도 하고, 옆에 앉지 말라는 말 같기도 했다. 나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 사람의 지시에 따랐다. 순한 양이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다른 생각을 해볼 겨를이 없었다. 예컨대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라든가, 내가 보았던 경멸의 눈 같은 그런 것.

 

    일어나서 물을 많이 마셨다. 요즘엔 잠에서 깨면 자주 목이 마르다. 무리해서 늦잠을 잔 날에는 도리어 몸이 무거워 일어나기 어렵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간만에 친구들과 옛날 이야기를 즐겁게도 떠들었다. 안그래도 이틀 연속으로 술을 마신 참이다. 전날 밤을 술과 추억팔이로 보냈으니, 그 사람이 떠오른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점점 더 예뻐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 이렇게 간만에 봐도 아름답나요?

 

    그 사람의 입이 움직였지만 멀어서 들리지 않았다. 옆자리로 가고 싶었지만 그 사람이 허락하지 않았다. 내 말도 전해지지 않은 편이 나았다. 그 때의 나라면 큰 소리로 말했을 것이다. 아니면 무턱대고 옆자리로 옮겼을 것이다. 뭐, 누가 보면 어때. 그런 말을 하며 무릎 위로 끌어앉히던 시절이다.

 

    얼마 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진을 찾아보았다. 무심하게 기대어 책을 읽는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이 연극적으로 멋졌다. 나는 왜 그렇게 해야 했을까. 언제나, 끝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른 근거도 없이 우리의 시간이 다시 올 것을 은근히 기대했던 것 같다. 그 후로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나는 잃어버린 낮에 대해서 생각한다. 우리가 나른하거나 무심하게 서로 기대어 비오는 발코니를 바라보고 있었을, 어느 일요일 낮의 서늘한 거실바닥에 대해서 생각한다. 한 번도 없었지만, 언제나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날의 오래된 기억에 대해서 생각한다.

 

    가끔 내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은 건넬 필요가 없다. 모르는 게 나을 답은 듣지 않는 지혜를 배웠다. 그래도 종종 우리가 걷던 그 길을 산책하는 상상을 한다. 우리가 좋아했던 서울의 작은 공원들. 내가 정말 산책과 공원을 좋아했던 건지, 아니면 그저 갈 곳을 몰라 시선이 없는 벤치에 기대어 앉아있고 싶었던 것 뿐인지, 이제는 더욱이 알 길이 없다. 나는 몇년 새 산책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이 되었고, 혼자서는 좀처럼 벤치에 앉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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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법은 무엇을 지키고자 하고,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교양으로 읽는 법의 세계

이 책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펴내는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중 하나로 법을 소개한다. 원제가 말해주듯 길지 않은 분량 안에 법의 생성부터 법이 다루는 영역, 법철학과 사법제도, 법이 직면한 현대의 과제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어느 때보다 법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이때, 교양으로서 법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 알맞은 ‘법 이야기’를 담았다. 이 책에서는 법을 고정된 실체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의 한복판에 두고 그 배경과 법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묘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법이 무엇인지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왜 역사마다 사회마다 법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해왔는지,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법의 한계란 과연 무엇인지 다채롭게 그려낸다.

교보문고 http://fa.do/7yn0
알라딘 http://aladin.kr/p/PJfyv
예스24 http://fa.do/8Xn
인터파크도서 http://fa.do/Vj8z

 

저자 : 레이먼드 웍스 (Raymond Wacks) 

홍콩 대학교 명예교수로, 동 대학 법과대학장을 역임했다. 법철학, 인권, 프라이버시 보호 분야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저술가이기도 하다. 저서로 『프라이버시와 미디어의 자유Privacy and Media Freedom』 『법학의 이해: 법철학 입문Understanding Jurisprudence: An Introduction to Legal Theory』 『법철학Philosophy of Law: A Very Short Introduction』 등이 있다.

 

역자 : 이문원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사와 정치학을 공부했고, 〈대학신문〉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주한미군방송국(AFNK) 뉴스부에서 영어방송을 제작했다. 현재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재학중이다.

 

미리보기

p.23

영미법 국가인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 안티과에서 지나가는 법학도 아무나 붙잡고 무엇을 공부중인지 물어보자. 십중팔구는 ‘판례를 읽는 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나 오스트리아, 알제리의 법학도에게 똑같이 물어본다면 민법전과 형법전을 집요하게 독파중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p.33

사람들은 부당한 일을 당하면 분개하며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런 문제는 법이 해결해줘야 할 것 아냐!”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 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태도이다. 그리고 만약 법이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하면 우리는 좌절감과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반사회적 행위를 법으로 규제하기란 겉보기만큼 간단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p.107

사회가 채택한 법과 도덕적 실천(또는 ‘실천 도덕’)의 관계는 일부가 겹치는 두 개의 원으로 그릴 수 있다. 두 원이 겹치는 부분에서 법과 도덕적·윤리적 가치는 일치한다(예컨대 살인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모든 사회에서 금지된다). 그러나 교집합 밖 한편에 위법하지만 꼭 비도덕적이지는 않은 행위(예컨대 주차 위반)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비도덕적이지만 반드시 위법하지는 않은 행위(예컨대 간통)가 있다. 교집합이 넓을수록 법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널리 인정받고 준수되기 쉽다.

  

pp.224-225

법의 중요성을 과장하기는 쉽다. 특히 법률가에게는 말이다. 그럼에도 역사는 우리에게 법이야말로 인간의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힘임을 가르친다. 이는 결코 작은 성취가 아니다. (…) 우리가 앞으로 다가올 재앙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리고 문명화된 가치와 정의가 승리하고 존속하려면, 법은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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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극장에서 혼자 봤다.

 

홍상수 영화가 맨날 똑같지 뭐, 하는 마음으로 들어가서 또 재밌게 봤다. 홍상수 근작 중에는 가장 좋은 것 같다. 특히 김민희의 연기가 아주아주 좋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쿡쿡 찌른다. <아가씨>에서도 그랬지만, 김민희는 히스테릭하게 소리지를 때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기이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다.

 

술냄새 진동하는 단체씬은 여느때나 다름없고, 홍상수 특유의 뜬금포 줌인 기법도 보는 맛이 쏠쏠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특히 좋았던 이유는 드물게도 여-여 케미가 매우 훌륭하기 때문이다. 전작들 중에 이런 적이 있었던가? 그동안 여러 뮤즈가 주인공으로 나왔지만, 대부분 홍상수분신 또는 미니홍상수 또는 홍상수워너비 사이를 뱅뱅 맴돌 뿐이었다. 달리 말하면, 홍상수의 전작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홍상수였다. 그러나 이번 김민희는 진짜 주인공이다. 그리고 김민희-서영화, 김민희-송선미의 케미는 나머지 남배우들과의 관계보다 훨씬 돋보인다. 김민희-서영화는 이상하게 중독적이면서도 편안하고, 김민희-송선미는 묘하게 긴장되면서도 자연스럽다. 비로소 홍상수의 세계가 자의식으로부터 파트너에게로 확장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남자들도 느낌이 조금 다르다.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이 후기작으로 갈수록 점점 더 ‘인간’이 된 건 사실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조금도 불편함이 없다. 처음 권해효가 등장했을 때의 약간의 긴장감을 제외하면, 모두 찌질함 없는 젠틀맨이 되었다. 홍상수맨에 깊은 애착을 갖고 열심히 경멸했던 나로써는 아쉬울 만도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사랑은 사람을 얼마나 바꿔놓는 것일까.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얄팍한 궁예질로 만족하기로 한다.

 

다만, 홍상수의 변명은 사족이다. (물론 홍상수의 변명이 아니라 김민희의 동요하는 내면이라고 주장하면 할 말은 없으나) 불륜이 불륜이지 뭐. 대단한 로맨스일 일도 악담을 퍼부을 일도 아니다. 굳이 찾아와 이 영화를 본 관객에게 설교할 것도 아닐 뿐더러, 변명할 일이 아니라는 말로 정작 변명하고 있지 않은가. 쿨한 척 하는 예술가의 쫄보근성을 엿본 것 같아서 다소 초라한 느낌이었다. 그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성취에 집중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예컨대 홀로 화면을 채우는 것만으로 관객을 외롭게 만드는 김민희의 공허하면서도 매력적인 눈매같은 것 말이다.

 

홍상수 영화를 정색하고 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상을 여럿 받았어도 마찬가지. 가끔 홍상수를 영화의 신처럼 추앙하는 사람을 보면 사실 나는 안목을 의심하게 된다. 그의 영화는 때로는 우습고 때로는 경이롭다. 그러나 어느 모로 봐도 자의식 과잉의 통속적 예술가일 뿐이다. 두 시간 피식대다가 마음을 울리는 한두 씬 건지면 그만이다. (예를 들어, 해변에 홀로 누운 씬은 너무 외롭고 아름다워서 충격받을 정도였으나, 복면맨의 등장이나 큰절씬은 좀 투머치 유치뽕이었다.) 나는 홍상수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팬이지만, 그 팬심은 레드벨벳을 향한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영화는 영화로 즐길 수 있도록 홍상수맨은 이제 그만 나타났으면 좋겠다. (불륜이라는 단어만 보면 날뛰는 성난 군중은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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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후기

일/글쓰기 2017.04.21 09:21

『법- 레이먼드 웍스 지음, 이문원 옮김, 교유서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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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의 여유가 생겨서 번역 후기를 기록해 둔다.

 

번역은 흥미롭지만 어려운 작업이었다. 즐거운 곤란함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타인의 글을 그저 읽는 것과도, 나의 글을 그저 쓰는 것과도 달랐다. 읽는 동시에 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마치 나의 말인 것처럼 쓴다. 번역자는 어디서부터 얼만큼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도 좋은 것일까. 서로 다른 두 언어를 중개하는 일은 예상만큼 어렵지 않았지만, 의외로 역자에게 적절한 지위를 부여하는 일이 꽤 곤란했다.

 

예컨대 저자의 문장이 불만족스럽거나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역자가 자신을 드러내도 좋은 것일까. 아니면 충실히 저자의 말을 옮겨서 그저 독자가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옳을까. 저자가 독특한 수사법을 사용하는 경우엔 어떠한가. 저자가 매우 현학적인 어휘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역자도 그에 준하는 현학적인 단어로 옮겨놓아야 할까? 현학적인 태도가 저자의 의도된 수사법이라기 보다는 그저 게으름의 산물이라고 보이는 때에도? 심지어 저자가 틀린 정보를 제시하고 있을 때라면, 역자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은가. 역자라는 핑계 뒤에 숨어서 ‘좋지 않은 우리 글’의 또 다른 탄생에 수동적으로 기여해도 괜찮은 것일까?

 

번역을 시작한 초기에는 소극적이었다. 대체로 저자의 문장과 1:1로 매칭이 되도록 충실히 옮겨놓는 길을 택했다. 초보 역자로는 그렇게 하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한국어 문장의 특성을 고려해서 문장의 어순을 바꾸고, 불필요한 주어를 생략하고, 영어 특유의 대명사의 남용을 지양하는 정도는 필요했으나, 그 이상으로 윤문을 하거나 아예 문장을 자르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장이 영 좋지 않았다. 저자는 법학교수 답게 매우 현학적이고 장황한 문장을 구사했기 때문에, 한국어로 바뀐 문장은 더욱 고답적이었다. (초벌 리뷰를 해 준 분은 내가 법학을 공부하더니 문장이 어려워진 것 같다고 평했으나, 나는 내 탓이 아니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독자는 역자의 핑계를 양해할 마음이 없다. 입문서라고 해서 읽으려는데 문장이 장황하다면, 역자의 실력과 성의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초벌번역을 마치고 며칠 뒤 다시 읽어본 글은 형편없었다.

 

결국 책의 후반부로 갈 수록 쉽게 쓰려고 했다. 아예 주어를 바꾸거나, 문장을 둘로 자르기도 하고, 의미를 해치지 않는 한도에서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써보려고 했다. 지금 다시 봐도 중반 이후부터는 읽기에 훨씬 수월하다. 아예 어떤 부분에서는 저자가 잘 못 썼음이 명백한 문단의 순서를 바꾸면서 연결어를 삽입하기도 했다. (이 부분에서 나의 의도를 오해한 출판사와 약간의 논의가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독자로서는 난데 없는 문단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문판 독자도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할 부분이었지만, 그런 체험까지 한국 독자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을까?)

 

갓 단행본 한 권을 번역했을 뿐인 초보 역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역서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개론서나 교양서의 수준에서는 역자가 전면에 나서는 편이 좋다. 의미를 해치지 않는 가능한 한도에서 최대한 해당 언어에 맞는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다시 써야 한다. 개성있는 역자의 무리수라고 볼 일이 아니다. 번역이 결국 우리말의 생태계에 다양성을 보태는 일이라면, 좋은 문장을 보탤 일이다. 새롭게 창작한다는 생각으로 번역을 해야한다. 원전에 충실해야 할 책(예컨대 강독을 위해 읽어야 할 고전)이라면 모르겠으나. (그러나 원전에 충실해야 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책이라면 원서로 직접 읽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러니, (번역을 할 일이 또 생길지 모르겠지만) 다음에는 적극적인 역자가 되겠다. 영미의 어느 탁월한 번역자는 이런 찬사를 들었다고 했다. 그 사람의 번역은 마치 원서를 통째로 머릿속에 넣은 뒤 영어로 다시 책을 쓴 것 같다고.


(덧. 이력의 대학신문에는 쌍꺽쇠를 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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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iot

사랑/일상 2017.02.25 00:19

그럴 때 답답해진다. 중언부언할 때. 마음을 표현할 어휘가 부족할 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적절히 언어화할 수 없을 때. 내가 쓴 문장이 전혀 내 마음을 포착하지 못해 불만족스러울 때. 쓰다 지우고, 또 쓰다 지운다. 바보같다.

글을 못쓰는 이유는 책을 안읽기 때문이다. 전에는 언제나 무언가를 읽고 싶어하는 편이었다. 활자중독이라는 말도 들었다. 요즘에는 멍때리는 시간이 많다. 글이 눈에 안들어온다는 말의 의미는 재작년쯤에 처음 알았다. 바보가 되고 있다.

언젠가 친구가 글을 잘 쓰는 방법에 대하여 물었을 때, 결국 표현하려는 내용이 좋다면 글도 좋아진다고 대답했었다. 글이 산만하다면 아직 생각이 정리가 안 된거다. 글이 어렵다면 아직 쉽게 설명할 준비가 안된거다. 주장이 또렷하고 근거가 탄탄하다면, 그냥 생각을 이어서 쓰기만 해도 감탄할만한 글이 된다.

그러니 글을 못 쓰는 나는 제대로 사고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봐도 되겠다. 책을 읽지 않으니 바보가 되는 것은 당연하고, 바보가 좋은 글을 쓸 리 없다는 것도 당연하다.

어떤 말을 들었다. 별 것 아닌 말이었다. 그런데 어떤 말은 시간이 지날 수록 뾰족해진다. 그 말을 곱씹을 수록 나는 허탈하고 쓸쓸해졌다. 가볍게 던진 말 사이로 언뜻 보이던 악의. 쓸쓸한 말을 곱씹는 대신 그에 대한 내 감정을 글로 표현해보려고 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깨달은 것은, 나는 아직 그 말에 대하여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바보같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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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_테드 창

 

영화 <컨택트Arrival>를 관람한 기세를 몰아 테드 창의 중단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를 읽었다. 안그래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간상”을 두고 친구들과 장광설을 늘어놓은 게 엊그제니, 나름대로 시의적절하고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그러나 테드 창은 갈팡질팡했던 것 같다. 쓰고 싶은 게 너무 많이 떠올라버렸는지도 모른다.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주변적 이야기를 적절히 컷트할 필요가 있었겠지만, 작가는 자신이 떠올린 아이디어 스토리의 ‘아이디어’에 지나치게 몰입해버렸다. 특히 후반부에는 겉잡을 수 없이 사변적인 결론으로 치닫는다. (나는 궁예는 아니지만) 중반까지와 이후의 전개를 보면, 최종 결과물은 테드 창이 애초에 쓰고 싶었던 형태의 소설은 아니게 되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창작의 ‘경로의존성’이야말로 이 책의 주제의식에 일관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 할말은 없지만.

 

그럼 과감히 궁예질을 해보자. 애초에 테드 창은 인간과 소프트웨어의 감정적 애착의 형성을 다루고 싶었을 것이다. 인간이 반려동물을 기르듯이 소프트웨어를 기르게 된다면 어떨까. 반려소프트웨어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보고, 그를 기르고 교육하는 일이 인간에게 감적적 유대를 가져다 준다면. 나아가 소프트웨어가 수명을 다할 처지에 있게 된다면. 예컨대 유행이 지나가버려서 더는 업데이트지원이 되지 않는 윈도우 95시대의 게임처럼 말이다. 최종 결과물과 연관성이 적어보이는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라는 제목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나 테드 창은 주체성과 선택이라는 사변적 이야기에 몰입해버렸고, 결국 서사의 중심을 이루는 딜레마는 흔한 가족용 성장드라마와 다를 바 없어졌다. 너무 빨리 자라나 내 손을 떠나게 된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불안한 시선같은 것 말이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에 관한 초기의 구상을 잘만 그렸다면 상당히 슬픈 소설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분간은 누구도 그런 소설을 쓰기 어렵게 되었다. 설익은 아이디어 스토리의 단점은, 유사한 아이디어로 쓴 이야기를 어쩔 수 없는 아류작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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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막스 리히터의 다른 곡으로 <컨택트>와 무관하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아마도 대학교 1학년에 처음 읽었다. 당시에 그 책에 너무나도 큰 감동을 받은 나머지 취향도 잘 모르는 동기의 생일 선물로 사주며 읽을 것을 강요했던 것 같다. (아마도 지금 연극판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옥자...?) 저 소설집에 실린 모든 소설이 다 좋았지만, 특히 세 편 정도를 가장 좋아했다. 표제작이기도 한 <당신 인생의 이야기>, <바빌론의 탑>, 그리고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오늘 <컨택트Arrival>을 보러 가면서, 도대체 테드 창의 소설을 어떻게 영화화할 수 있는지 몹시도 궁금했다. 외계인과 지구인의 첫 조우라는 일견 스펙터클한 표면적 서사와는 달리,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언어와 시간에 관한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나로써는 시각화했을 때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지는 둘째치고, 시각화가 가능한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초장부터 내가 좋아하는 막스 리히터로 마음을 두들겨 놓더니, 미지를 향한 호기심에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가, 결국 수미쌍관의 교차편집으로 나를 울려놓고 말았다. 원작과는 다른 부분이 좀 있지만, 오히려 영화에 디테일을 부여하고 훌륭한 시각화가 가능하게 한 것 같다. 큰 기대 안하고 시간 떼우러 갔다가 깜짝 놀라서 왔다.

 

배급사가 왜 제목을 근본 없이 컨택트로 정했는지는 의아하지만(관객들이 동명의 유명한 작품을 연상하기를 기대한 것일까), 영화의 방점은 컨택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어라이벌이므로, 여러모로 잘못된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arrival이기도 하지만, a new era의 arrival이기도 하므로.

 

내일 아침에 도서관으로 테드 창 소설집 빌리러 간다.

 

cf. 감독이 <블레이드 러너> 후속작도 만든다는 것 같은데, 눈여겨 봐야겠다. 참고로 드니 빌뇌브 감독은 퀘벡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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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코의 미소』를 다시 읽었다. 지난 번에「쇼코의 미소」를 읽고, 오로지 선한 의도로 가득찬 주인공들에 대해서 불평했다. 다시 읽고 나니 마음이 바뀌었다. 그리고 최은영 작가님의 팬이 되기로 했다. 특별히 대단히 좋았던 작품이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무리하지 않는 정도로 재미있었다. 어색하다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으나,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문체가 담담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쇼코의 미소』를 읽고나면 좋은 이야기를 잘 들었다는 만족감이 든다. 일종의 작은 어쿠스틱 콘서트라고 할까. 대단한 실력파라는 느낌이 없어도 저절로 빠져드는 소극장의 아늑함이랄까. 작가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이한 관념이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읽었더라도 작가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느끼는 일은 드물다. 작품은 작품이고 작가는 작가니까. 그러나 최은영의 소설을 읽고 나면,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분명 친해져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작가님이 다음 작품도 잘 써내기를 응원하는 팬심 가득한 독자가 되었다.

 

  아마도 작품에서 자전적 목소리가 많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세대의 권작가님이라고 보아도 되겠다. 내가 특히 재밌게 읽은 건 외국사람과 교류하는 대목들이다. 서로 터놓고 소통하길 원하면서도 언어·문화적 차이로 오해가 생길까 두려워 양해를 거듭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제멋대로의 호의와 기대로 반목하게 되는 사람들. 경험에서 나온 듯한 자전적 이야기가 특히 매력적이다. (반면 서영채 문학평론가가 해설하는 조부모와의 정서적 교감 부분은 크게 공감되지는 않았다. 나의 경험적 한계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조부모의 마음을 순하디 순한 무조건적 사랑으로 그리는 것은 조금은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품보다 작가에 호의를 가져도 괜찮은 것일까? 아무리 작가가 마음에 들었다지만, 작품평을 찾아보는 대신 작가의 인터뷰를 검색하는 것은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뭐, 딥러닝 시대에 어울리는 독자의 자세이긴 하다. 훗날 알파고가 아무리 좋은 소설을 써내게 된들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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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영화 몇 편

놀이 2017.01.10 17:03

소설과 영화 몇 편

 

종강 후에 소설과 영화를 여럿 보았다. 2016년에 못다한 문화생활을 막판에 몰아서 하는 건지, 2017년에 못다할 문화생활을 초장에 끝내려는 건지, 여하튼 많이 보았다.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감성이 메마른 사람이 되고 있다. 좀처럼 울지 않고 감동받는 일이 드물다. 웃긴 걸 보면 잘 웃는걸 보면, 그냥 소시오패스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법 공부 탓으로 돌릴 마음은 없지만, 수험생의 조급함이라는 게 시야를 좁게 만드는 것 같기는 하다.

 

먼저 기대하던 켄 로치 감독의 신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은 하지만 글쎄.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별점 몇점이냐고 묻는 친구의 말에 3.5/5.0점이라고 대답했다. 좋은 영화에 왜 그렇게 낮은 점수를 줬는지 처음에는 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와서 말하자면 다니엘 블레이크를 그리는 켄 로치의 인간관에 동의할 수 없었다고 말해야 할까. 켄 로치가 그리는 블레이크씨는 지나치게 투명하다. 이웃을 이유도 없이 돕고,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우며(그가 가진 유일한 편견은 성매매에 관한 것일 뿐), 결코 동요하지 않는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조차 스스로 감내할 뿐이다. 켄 로치식의 인민 영웅이다. 그러나 나는 흠결이 없는 영웅담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편의와 목적을 위하여 의도된 납작함으로 납득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보장 시스템의 한계를 고발하려던 것이라면, 영화보다 얼마든지 나은 매체가 있다. 인간을 얄팍하게 그리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려하게 드러낼 수는 없다.

 

비슷한 느낌을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로부터 받았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은 처음 읽었는데, 뻔한 소재를 뻔하게 그리는데도 묘하게 매력이 있다. 담담하고 담백한 서술이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연상시킨다는 평에 크게 공감이 갔다. 그러나, 최은영의 인물들은 모조리 착해빠졌다. 답답할 정도로 착한 사람들이다. 모든 작중 갈등의 원인은 외부에 있다. 잘못된 교육, 사회적 억압, 편견, 그런 것들은 작중 인물의 잘못이 아니다. 오로지 선한 의도로 가득찬 주인공들이 불화하는 것은 사회의 부조리함일 뿐이다. 아마도, 최은영 작가 본인이 그런 사람일 것이다. 오로지 선한 의도로 가득찬 사람. 그러나 나는 이기심과 탐욕, 경멸과 혐오의 감정을 모르는 사람을 작가로서 신뢰할 수 없다. 그런 글은 아무리 재미있어도 그저 잘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작가를 신뢰하지 못하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없다. 정이현의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읽으면서도 들었던 생각이다. 이번 단편집에서는 첫번째 수록작이 유독 재미가 없었다. 정이현은 서울에 사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는 잘 그리지만, 주인공이 남자인 작품은 도저히 감정이입을 할 수가 없었다. 작가의 목소리가 마치 어색한 가면을 쓴 듯 생경하여 몰입하기 어렵다. 남성 작가가 그린 여성 주인공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느끼게 될까? 나머지 작품은 괜찮았으나 첫인상이 좋지 않아서 아쉬웠다.

 

반면 완전히 놓아주기로 마음먹은 작가도 있다.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을 읽으면서는 혹시 <백의 그림자>가 뒷걸음질로 잡은 쥐가 아닐까 생각했다. 나의 문학적 교양이 빈약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새 작품이 나오더라도 굳이 찾아 읽는 일은 없을 것이다. (최은영이나 정이현의 신작은 환영이다)

 

그리고 화제의 <너의 이름은>. 그럭저럭 볼만한 애니메이션이지만, 그 정도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감각적인 표현에는 능숙하지만 인간의 복잡함을 섬세하기 그릴 줄 모른다. 한 편의 뮤직비디오라면 매우 훌륭했을 것이다. 두 주인공인 마츠다나 타키 모두 평면적이기 그지없고, 나머지 인물은 기계적 장치에 불과하며, 신사를 둘러싼 신화적 상상력도 이야기와의 결합이 피상적이다. 모든 운명이 주인공의 각성으로 귀결되어 세카이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야기적 재미의 핵심은 학교생활에 있어야 했지만, 아마도 감독은 그리 인간적으로 풍요로운 학창시절을 보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결핍된 사춘기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될 정도) 결과적으로 모든 것은 일종의 단편적인 스케치의 나열에 불과하게 된다. 그 스케치가 매우 훌륭하므로 나머지 단점을 잘 가려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니 내가 여전히 믿고 찾을 수 있는 것은 10년 전부터 읽은 권여선 작가의 신작 <안녕 주정뱅이>나, 오래된 스타워즈 프랜차이즈인 <로그원> 같은 것들이다. 구관이 명관이다. 취향도 편협한 꼰대가 되어가는 것일까. 새로운 작품을 좋아하게 되는 일이 드물다. 그렇다고 본 작품을 다시 찾는 사람도 아니건만.

 

아, <라라랜드>를 빼놓을 수 없지. 올해 가장 좋았던 영화, 꿈꾸는 기분으로 보았다. 재즈를 매우 좋아하긴 하지만, 사실 그다지 jazzy한 영화는 아니다. 고슬링은 케니지를 조롱하고 있지만, 사실 <라라랜드>는 그야말로 케니지같은 영화니까. (케니지는 좀 심하고 빌 에반스 나 키스 자렛정도?) 긍정 에너지로 톤업된 white-washed <치코와 리타>랄까. <본투비 블루>처럼 재즈에 관한 영화는 전혀 아니고, 사랑과 성공, 만남과 엇갈림에 대한 잘 짜여진 헐리우드 뮤지컬이다. 그래도 좋다. 아무리 게토한 사람이라도 매일같이 마일스 데이비스나 쳇 베이커만 듣고 살 수는 없다. 게다가, 빌 에반스도 역시 대단히 훌륭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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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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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도 라라랜드의 엠마스톤이 좋아요. 물론 라라랜드를 보진 못했고, 버니 하우스에서 처음 접했지요. 티스토리 하고 싶은데 초대 해주세요. 메일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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