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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리본의 시절> _ 권여선

 "새로 이사간 신도시에서의 가을은 그렇게 안온하고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지나갔다. 그해 가을을 회고하면서 내가 품는 의문은 이것이다. 수림도 선배가 저지른 그 많은 실수 중 하나였던가? 그리고 나도? 선배의 아내는 이 모든 사태를 훤히 알고 있었던가? 선배는 아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가?"

 "순간 툭 하고 뭔가 나를 치고 지나갔다. 아니 내가 그것을 툭 쳤는지도 모른다. 곪은 부위처럼 민감한 그것, 오래 전에 단념했다고 믿었던 그것, 그러나 어느 틈에 농익어 진물을 흘리는 그것, 입안에 다소 끈끈하고 신 침을 고이게 하고 미간을 오그라들게 하는 그것, 툭 건드려진 뒤부터 움찔 움찔 움직이며 몸을 비트는 그것. 나는 책장의 흰 가로장에 이마를 대고 울었다. 울면서, 내가 내 뒤통수를 내려찍는 이런 상쾌함이 없다면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무엇이겠는가, 생각했다."

 "나는 내가 기다린 것이 몽골의 남자친구가 아니라 모종의 극단적인 파국이었음을 알고 있다. 언니라고 살갑게 부르면서 선배의 아내를 기망한 나. 호시탐탐 선배에게 가랑이짓을 한 나. 쎅스광인 수림을 한없이 혐오하면서도 온 정력을 다해 질투한 나. 모든 정보를 모른 척 누설한 나. 고립이란 명분 뒤에서 늘 추잡한 연루를 꿈꾸어온 나."

  가쁜 숨을 참듯이 권여선의 문장을 읽었다. 이제 그만, 충분한데, 라고 둘러댈 겨를도 없이 떠밀려버리는 기분. 이해했다고 생각한 말이 다른 이미지에 겹쳐지고 또 겹쳐지면서 나도 몰래 휩쓸려버린 듯한 불쾌감.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좋은 속을 후비고 뒤집어서 꺼내놓을 때의 섬뜩함.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고 머릿속에서 쿵쾅대지만, 어쩐지 문고리를 돌리고 있는 손의 외설적 이질감.

 홍상수는 괴물은 되지 말자고 말하는 스스로의 속물적 괴물성을 조소했지만(메타-조소), 권여선은 자신의 욕망을 혐오함을 욕망(메타-욕망)하고 있다. 그런 권여선의 (메타)욕망을 우울한 자기혐오로 엿보는(욕망하는) 독자는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작가랑 친해지고 싶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


2010. 9. 9.

WRITTEN BY
moonwon
moonw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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