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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2011.03.13 23:32
특별한 일이 아니면 잘 펼치지 않는 내 일기장에는 신환회 첫 날의 감상이 이렇게 시작되어 있다.

"휘황한 달빛 아래 서른 명 정도의 사람들이 녹두를 향해 걸었다. 고향은 어디에요, 학교는 어디 나왔나요, 떠듬떠듬 어색하게 묻는 목소리 사이로 서로를 향한 호기심과 설렘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문득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구나 하는 벅차오름을 느꼈다. 바로 선배들과 인사하고 동기들과 번호를 교환하던 바로 그 순간에!" -2007. 2. 8.

미지의 생활을 앞둔 야릇한 흥분. '새내기'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다시 찾아오는 그 청춘의 감정에는 누구든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다. 막막하게 흔들리면서도 기대감에 설레는 기분. 모든 스무 살이 느끼고 있을 그 감정에 나는 오랜만에 옛 자료집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진부한 말이지만, 같은 문장을 읽어도 감상은 전혀 새롭다. 의뭉스런 선배들이 꽁꽁 숨겨둔 행간의 의미는 다섯 번 쯤 다시 읽어야 보따리를 풀어놓는 모양이다.

앗 그런데 선배라니. 믿기 어렵겠지만 5학년인 나에게도 선배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 아직도 있다. 그것도 06, 05학번뿐이 아니라 지금은 삼십대에 접어든 01, 00학번 같은 사람들도 있다. 지금 11학번이 조금 어색하고 의심스러운 눈길로 나를 보듯 내가 낯설게 쳐다봤을 그런 선배들. 우연히 모반에 들어왔다는 점 이외에 어떤 그럴싸한 인연도 없는 나를 뻔뻔하고 오지랖 넓게도 진심으로 환영해 주었던 그런 선배들. 서로 책임지지 않는 관계가 '쿨함'으로 찬미되는 이 시대에, 내 인생에 감히 개입하고 훈육(!)할 용기를 내어준 귀찮은 사람들 말이다.

무엇인가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랬다. "고학번 선배"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나에게도 닥치고 나서야 나는 당시에는 알아듣지 못했던 어떤 선배의 말들이 불현듯 이해되곤 한다.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어떤 대화의 뒤늦은 방문에 나는 어리둥절했다가, 반가웠다가, 다시금 서글퍼지는 것이다. 나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넌 요즘 하는 고민이 뭐니?" 그/녀들의 악취미적 질문이 물어다 준 소통과 미혹의 감격을 나는 흔히 왜곡하거나 폄훼하곤 했다. 아둔하고 자존감만 높았던 나는, 나만 모르는 얼마나 많은 수치스런 행위와 제멋대로의 오해를 반복했던 것일까.

내 대학생활의 전부를 쏟아 부은 모반과의 몇 년으로 나는 몹시도 많이 변했다. 모반에서 지지고 볶고 웃고 다투는 동안 나는 조금 울었고 종종 벅찼으며 다행히도 자주 자랐다. 어떤 만남은 이처럼 뜻밖의 오해나 우발적 마주침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작되어버린 모반은 나를 통째로 뒤흔들었고 인생의 방향을 다소간 바꿔버렸다. 이제는 나 자신의 의지로, 어.쩌.다.보.니 모반에 들어와버린 새내기들을 격하게 아껴주려고 한다. 이들의 반짝이는 청춘이 한 번 기를 펴보지도 못하고 야만의 시대에 억눌려 살아가지 않아도 되도록,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바로 나의 사랑스런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해도 좋을까? 하물며 나 자신도 이토록 진동하며 갈피를 못 잡는 주제에?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확신에 차서 달려가는 사람은 드물었던 것 같다. 나에게 그토록 많은 화두를 던졌던 선배들도 지금의 나만큼이나 한 아름의 고민을 끌어안고 있었다. 정답이 있는 것처럼 들리던 그/녀들의 질문은 실은 더 거대한 의구심의 한 표현이었고, 나에게 건넨 말들은 실은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했으며, 또한 그것은 느낌표로 위장된 은밀한 물음표였던 것이다. 뒤늦게 깨닫게 된 이 작은 비밀은 나에게 적잖이 위안이 된다. 바로 나 자신이 고민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내가 당신에게 건네는 말의 의의를 조금도 훼손하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민하는 사람으로써 하는 질문이 당신의 마음에 일으킬 잔잔한 울림을 기대하면서

사랑스런 풍경이 그만 바뀌었으면 좋겠다. 어색하고 촌스러운 표정으로 바위처럼을 추는 몸짓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해방터"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누군가는 오늘도 보편성을 상상하며, 또 서로 연대(Solidarity)하고 교통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유도 모르게 찾아오던 일상의 불안감을 고맙게도 덜어주던 손길을 누군가는 계속 건넸으면 좋겠다. 내면화된 경쟁의 원리를 넘어 "함께 살자" 뜨겁게 외치던 함성이 어딘가에서는 여전히도 울려퍼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아마도 많은 것이 변할 것이다. 어쩌면 이미 너무도 변했는지 모른다. 철지난 유행가처럼 어색하게 들릴 내 편지를 누가 기억해 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게 될까. 잔치가 끝나도 누군가는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운다지만, 우리가 부르다 만 노래는 홀로 마저 고쳐 부르기엔 너무 서글픈 멜로디가 아닌가.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눈이 쌓였다 녹고, 나는 여전히 막막하게 흔들리고 있다. 다시 내년 이맘때 우리는 또 어딘가에서 겨울눈을 밟으며 새맞이의 야릇한 흥분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때는 나도, 당신도 모두 조금씩은 달라져 있겠지. 물론 어떤 이와는 같은 꿈을 그리며 달리기도, 또 어떤 이와는 만나지도 못한 채 각자의 길을 가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의 짧은 만남이란 실은 별 것 아니었노라고 어렴풋이 회상하게 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웃고 싸우고 사랑한다면, 오늘의 모든 말이 허망한 것이었다고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일단은 그렇게, 믿어보기로 한다_


WRITTEN BY
moonwon
moonw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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