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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마나한 이야기_

  영화 <캐롤>을 봤다. 과연 대단한 분위기의 영화다. 케이트 블란쳇의 눈빛과 태도에 홀려버릴 것 같았다.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세 번 정도 전율이 있었다. 멜로영화에서는 드문 일이다. 특히 시각적으로 황홀한 경험이었다. 전후 뉴욕의 분위기를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은 나의 감상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감상에 대한 불만글에 가깝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캐롤>에 관한 영화평을 좀 찾아본 게 화근이다. 답답해서 글을 안쓸 수 없었다.

  영화평들이 전부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랑 같은 영화를 본 게 맞는지 따져 묻고 싶을 정도다. 예컨대 많은 수의 감상이 “동성애를 제쳐놓고 보면 그저 보편적인 사랑일 뿐이다”라고 적고 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동성애 영화에서 동성애를 제쳐놓고 볼 이유는 무엇이며, 보편적인 사랑을 말하지 않는 멜로영화는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러한 영화평이 문제적인 이유는, 이 영화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뿐더러 심지어 정면으로 반하는 감상이기 때문이다. 어떤 유명 평론가는 “레즈비언이라기보다는 그 캐롤을 사랑한 것인데 그 캐롤이 하필 여자였던 것”이라는 말도 했다는데, 미친놈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날 화나게 하는 하나마나한 영화평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이다: 1) 동성애도 사랑임을 강조하며 애써 ‘정당화’하려는 영화평, 2) 보편적 사랑을 강조하며 동성애를 ‘삭제’하려는 영화평.

  1) <캐롤>의 감상에는 보편적 사랑이야기라는 ‘정당화’가 전혀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영화의 태도와 시각이 전혀 그러한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캐롤과 테레즈의 운명적인 만남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동성애에 관한 정치적 태도를 의식적으로 배제한다. 말하자면, 동성애의 ‘인정 여부’는 감독의 안중에 없다. 그런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동성애도 사랑이란다’ 운운하는 건 <캐롤>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하나마나한 혼잣말이다. 마치 윌 스미스의 <핸콕>를 보고 나서 “비록 흑인이 주인공이지만 보편적인 히어로물이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런 감상은 영화평이 아니라 자기 편견에 관한 고해성사가 될 뿐이다. 다른 헤테로 멜로영화를 보면서 ‘그래, 이것도 보편적 사랑일 뿐이야’라고 정당화해본 적이 있는가? 그래야 할 필요성이라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아니라면 왜 <캐롤>에 대해서 그런 영화평을 늘어놓는가? 정당화를 요구하는 동성애 영화도 많다. 정치적 독법이 필요한 영화도 많다. 하지만 <캐롤>만큼은 절대 아니다. 명시적인 무정치성이야말로 이 영화의 정치적 태도이다.

  2) 더 큰 문제는 동성애를 ‘삭제’하고 보편적 사랑으로 읽으려는 감상이다. 이러한 영화평들은 결국 이 영화의 모든 훌륭한 성취를 외면하게 만든다. 애초에 보편적 사랑 운운하는 것도 웃기지만, 모든 보편성은 잘 그려진 특수성으로부터 나온다. 이 영화가 캐롤과 테레즈의 감정선과 고뇌를 훌륭하게 드러냈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오직 1950년대 레즈비언의 사랑의 조건을 세심하게 포착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랑은 보편적이지만 그 조건은 제각각이다. 제각각의 조건을 탈각시키지 않는 것이 사랑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길이다. 그리고 <캐롤>은 매우 훌륭하게, 그러나 오버하지 않고, 이를 묘사한다. 그러니 동성애는 ‘불편’하니 그저 보편적 사랑이야기로만 읽겠다는 관객은 이 영화의 모든 훌륭한 점을 오독하고 있는 것이다. <오만과 편견>에서 16세기 영국을 지우거나 <타이타닉>에서 19세기의 계급성을 지우려는 시도나 얼마나 허망한 것일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런 이야기들은 <캐롤>의 감상과 무관한 시민적 기본교양에 속하는 것이다. 하나마나한 이야기 대신에 <캐롤>에 관하여 다음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1) 우유부단하고 나약해보이던 테레즈의 의외의 결단의 순간들에 대하여(그리고 변화의 원동력이 사랑에 대하여) 2) ‘표면적으로는’ 캐롤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둘 사이의 권력관계에 대하여 3) 지극히 무신경하고 도무지 인정할 줄 모르는 <캐롤>의 남자들에 대하여(그리고 <캐롤>과 역-벡델테스트) 4) 흐릿한 유리와 거울을 통해 상대방을 보는 장면들에 대하여 5) LP샵에서의 레즈비언 커플의 의미에 대하여 6) 수미쌍관식 구성의 탁월함에 대하여 7) 홈파티에서 테레즈의 시선을 끌던 여성과의 대화에 대하여(테레즈의 개안?) 8) 그리고 몹시도 훌륭했던 OST의 활용! 기타등등 기타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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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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