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인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인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의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 이은규, <바람의 지문> 중
오늘은 보잘 것 없는 바람에 설레여 했다. 가끔은 이렇게 온통 글이 될 것 같은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덮인 책장처럼 얌전히 앉아서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지.
이은규의 시집 <다정한 호칭>은 이제 우리 집에 없다. 누군가에게 줘버렸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이 시집에서는 세 편의 시가 마치 연작같은 느낌을 준다. <바람의 지문>, <속눈썹의 효능>, <심야발 안부>.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속눈썹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건네준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건네받은 사람
온 곳을 모르므로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마음일 때
깜박임의 습관을 잊고 초승달로 누운
이은규, <속눈썹의 효능> 중
유예될 수 없는 문장들로 가득한 밤
이번 편지도 수신인에게 잘 도착할 거라는 예감
베개 밑 심야발 안부를, 아침에서야 받을
이은규, <심야발 안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