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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은 / 허연

내 사랑은 / 허연

 

내가 앉은 2층 창으로 지하철 공사 5-24공구 건설현장이 보였고 전화는 오지 않았다. 몰인격한 내가 몰인격한 당신을 기다린다는 것. 당신을 테두리 안에 집어넣으려 한다는 것.

창문이 흔들릴때마다 나는 내 인생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불행의 냄새가 나는 것들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붙들고 있는 것들.

합성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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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 방의 창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창이 적당하게 크고 오후 느지막이는 햇살이 들이치며 열어두면 선선한 산바람이 들어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요즘의 방들에는 옹색한 창들뿐이고, 그마저도 건물이 앞을 다 가려 매일이 그늘인 경우가 허다하다. 해가 미치지 못하는 방에는 대개 해로운 냄새가 났다. 해로운 냄새는 쉽사리 몸에 밴다. 한 번 그런 냄새가 스며들고 나면 아무리 일광욕을 해도 눅눅함이 가시지 않는다.

테두리에 집어넣으려 했다. 테두리에 갇히고 싶었던 날도 많다. 자주 기다렸고, 더 오래 지치게 했으며, 끝내 나타나지 않은 적도 있었다. 빨지 않아 물얼룩이 진 베갯잇에는 우울한 생활이 배어 있다. 바스락 바스락, 베개를 끌어안고 누워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플라스틱 속으로 채워진 베개를 베고 잔 후로 꿈이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던 그 남자의 이야기처럼, 내가 이 베개를 베고 자면 흔들리는 숲을 꿈꾸게 될까. 나무 하나가 흔들리고, 나무 둘이 흔들리고, 나무 셋이 흔들리고...

바보같다고 생각했다. 상상도 못할 만큼의 결속을 은밀히 감추고 있었을 그 사람들을 보면서, 이제는 좀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내 멋대로 착각일 뿐이었을 때. 나는 그 사람들이 처절하게 결별하고, 서로를 찢을 듯이 할퀴고, 완전히 불신해버리는 환상을 즐겼다. 내가 굴욕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뒤늦게 깨달은 내 착각의 애처로움이 아니라, 그걸 다 알면서도 짐짓 미소지어준 그 사람의 친절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