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의 끝

사랑/일상 2019.02.07 00:52

이제껏 도약을 꿈꿔본 적 없다
다만 사각형의 문들이 나를
공허에서 공허로
평면에서 평면으로 옮겼다 – <전락>, 심보선

신기한 마음이 들 때에는 글을 읽는다. 때로는 타인의 글이 나보다 더 내 마음을 잘 아는 것 같다. 명절 연휴는 평범하지 않은 듯 평범하였으나, 오가는 길에 글이 풍성해서 좋았다.

사람은 서른을 넘으면서 취향이 고정되어 버린다고 했다. 그 전까지는 항상 새로운 노래, 새로운 작가, 새로운 영화에 목말라 하지만, 서른을 넘기면 전에 듣던 노래, 책, 영화를 다시 찾는 게 편해진단다. 낯설고 새로운 것은 피곤해지고, 익숙한 옛 것은 반갑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만히 살다가는 순식간에 뒤떨어진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니, 의식적인 노력으로 새로운 것들을 찾으며 살아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다.

반쯤 읽다 만 박준이 피곤해져서, 문득 심보선의 시를 찾았다. 소장했던 시집은 모두 어딘가에 넘겨버렸으니 누군지 모를 이의 블로그를 기웃거리는 수밖에 없다. 그럴듯한 서재를 갖기엔 거추장스러운 삶이라서 하나둘 책을 처분한 일이 이런 날에는 또 아쉬워진다. 살면서 두 번쯤 서재를 비웠고, 그 후로 책장을 새로 사지 않았다. 내가 몰래 접어둔 귀퉁이와 마음 속 밑줄들은 지금 누구의 서재에 잠들어 있을까.

언젠가 우리의 서재를 마련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기쁨과 슬픔을 가득 담은 책들 차곡차곡 채워 넣을 것이다. 거추장스럽고 잡스러운 글들을 아득바득 끌어안고 보란 듯이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노년의 어느 나른한 오후, 서재에 함께 기대어 오늘의 신기한 마음을 손끝으로 더듬어 볼 것이다. 그런 날이 있었지, 하면서 기억도 나지 않을 대화들을 추억할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새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서재를 짓는 날이 오면, 심보선 시집은 하나 꽂아두어야겠다.

온 세상을 슬픔으로 물들이게 하려고
우는 아내가 식탁 모서리를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마술이다 - <아내의 마술>, 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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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 9p

어느 날엔가 인생의 네 단계에 관한 영상을 본 일이 있었다. 유튜브의 그저 그런 “inspiring videos” 채널 중의 하나였는데, 충실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음의 네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1) 주위를 보고 따라하는 유아기, 2)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를 시험하는 청년기, 3) 한계에 맞추어 목표를 선택하고 열중하는 중년기, 4) 인생의 유산을 남기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노년기. 그리고 위 각 단계를 잘 거치기 위해서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삶의 진실이 있다. 언제나 꿈과 희망을 좇으라고 부추기는 세간의 말과는 반대로, ‘인생은 유한하며 나의 능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서둘러 찾아 집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꿈같은 이야기만 늘어놓고는 아무런 정작 성취도 이루지 못하는 피터팬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다.

가끔 내가 인생의 조연이라는 생각을 한다. 수많은 출연자들의 목소리 속에서 가까스로 얼굴을 비추는 단역. 내 인생에서 내가 조연이라니 이상한 감각이지만, 어쨌거나 영웅적 주인공이 부재하는 서사라도 그럭저럭 읽히는 법이다. 나 자신은 결코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고, 나의 의지만으로 인생을 만들어갈 수도 없으며, 대단치 않은 삶이나마 살아가는 일에도 대단한 노력을 요한다는 것. 그런 생각을 처음 했을 때에는 꽤나 충격을 받았다. 내 앞날에는 고귀하고도 찬란한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인생이 평범하다는 사실이 익숙해졌고, 어느 때에는 적잖이 위안이 되었으며, 때때로 그 쓸쓸함이 고맙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도 쓸쓸한 조연의 이야기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퇴역탐정 ‘기 롤랑’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작은 단서들을 더듬어 나선다. 아주 조금씩 자신이 누군지, 왜 기억을 잃었는지 알게 되지만, 결코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오히려 슬프고도 처연한 텅 빈 막다른길에 다다르고 만다. 아무 것도 없는 끝에 다다라서도 기 롤랑은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해변의 사나이’처럼.

‘해변의 사나이’는 사십 년 동안이나 바닷가나 수영장 가에서 여름 피서객들과 할 일 없는 부자들과 한담을 나누며 보냈다. 수천수만 장의 바캉스 사진들 뒤쪽 한구석에 서서 그는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룹 저 너머에 수영복을 입은 채 찍혀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며 왜 그가 그 곳에 사진 찍혀 있는지 알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해변의 사나이’들이며 모래는 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 - 76p

줄거리는 귀여운 이야기들의 모자이크같다. 주인공은 퇴역탐정이고, 전개는 일단 추리물의 형식을 따르지만, 정작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추리의 목적과 무관하다. 대신 러시아식 장례식, 호텔 바의 일본인, 너무 젊은 여자와 결혼한 피아노맨, 공탁된 성의 관리인, 살롱의 장의자에 잠든 여인같은 이미지들이 연속적으로 제시된다. ‘기 롤랑’이 방문하는 어느 ‘미로’ 정원처럼, 이 이야기는 탈출이 목적이 아니라 미로를 헤메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안개 낀 가로등 밑처럼 모호한 과거의 비극을 더듬어가는 여정 자체가 이 소설의 즐거움이다. 너무나 슬프고도 처연한 결말은 안개를 비추던 가로등 빛줄기마저 꺼버리고 말겠지만.

그러니 이 소설의 형식은 결론과는 모순된다. 살아가면서 만난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간직하고 있는 기억을 모으면 인생이 된다.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만 살아가는 셈이다. 그러나 타인의 이야기 속 나는, 옛 사진에 찍혀있는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조연들처럼 덧없이 조각나고 만다. 타인의 이야기를 떠돌 수밖에 없는 우리지만, 그 타인은 좀처럼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그러니 삶의 비극은 조연성에서 온다.

요 얼마간 주인공의 마음으로 살았다. 꿈같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서막으로 여긴 일도 있다. 그러나 고귀함은 삶의 조연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온다. 그러니 작은 불일치에 쉽게 낙담하지는 말도록 하자. 쉽게 지워지고 말 발자국이라도, 용기 내어 내딛는 한 발이 필요한 법이다.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소녀가 멀어져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만큼이나 빨리 저녁 빛 속으로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2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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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의 울음은 그들의 이름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요
원래 인간은 제 이름보다 남의 이름을
더 많이 부르는 종이잖아요
나는 당신의, 당신은 나의 이름을

- 문혜연, <당신의 당신>

연말에는 나카메구로 천변을 걷다가 까마귀 한 마리를 보았다. 커다란 은행나무에 홀로 앉아있었다. 찬 겨울바람에 가지가 흔들려도 까마귀는 울지도 않고 조용했다. 전철고가 밑 작은 카페는 차분한 등불을 켜 두었다. 전철이 지나갈 때마다 조용하던 카페에 묵직한 진동이 울렸다. 멀리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가 약한 맥박소리처럼 처연했다. 도쿄의 밤은 떠들썩하지도 흥청망청하지도 않았고, 내내 그리운 마음이었다.

연말에는 하마리큐 정원을 걷기도 했다. 겨울바람이 차도 볕 아래 온기가 가득했다. 나지막한 언덕에 올라 멀리 도쿄만의 현수교를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나타난 어린 남매가 언덕을 구르며 깔깔댔다. 추위에 발그레한 볼을 보니 너도나도 뭉클해졌다. 멀리서 남매의 엄마가 소리쳤다. 두 아이의 이름을 불렀을까. 일본어를 모르는 나는 10년 후를 생각했다. 찻집에 나란히 앉아서 작은 호수를 바라보는 동안 마음속으로 우리의 안부를 물었다. 둥근 찻잔을 감싼 손이 따뜻했고, 내내 살가운 마음이었다.

신년을 맞아 신춘문예 당선시를 찾아 읽던 저녁이었다. 책방을 걷던 발걸음이 동시에 멈춰섰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당신 같은 시집이다. 혼자에게는 채이지 않던 시집을 각자의 마음에 품고 귀갓길을 재촉한 저녁이었다.

그 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 박준, <선잠>

2019년 연시의 일이다. 혹은 2018년 연말의 일이다. 살다보면, 제목만으로 평생을 사랑할 것 같은 시집을 만나기도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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