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32) 썸네일형 리스트형 J에게 그래서였을까. J의 생각이 내 생각과 다를 수 있고, J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지 않을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갑작스럽고 생소한 균열감에 어딘가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쌍둥이조차 삶이 같지 않다는데, 30년을 다르게 살아온 우리가 같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 허황된 믿음이겠지. 그래도 나는 어쩐지 우리만은 기적처럼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희망을 가져보곤 했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J가 나를, 우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는 말. 내가 J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말. 그리고 나 스스로가 J를 실망시켰다고 느끼는 순간들. 너무 유치해서 겉으로 내색하기는 어렵지만 내심 서운하고 어딘가 쓸쓸해지는 상황들. 아마도 J도 다르지 않았겠지? 그.. 하마구치 류스케, <드라이브 마이카> 연초부터 하마구치 류스케의 를 보았다. 동명의 하루키 소설이 원작이라고는 하지만, 원작의 비중은 영화의 절반 정도 될 것 같다. 나머지는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류스케 감독의 순수 창작물(이거나 체호프의 희곡에 관한 류스케의 해석)이다. 그러니 절반씩 차지하고 앉은 하루키와 류스케가 팽팽하게 겨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류스케의 각본이 문학적으로도 하루키 못지 않게 혹은 때때로 더 뛰어나다는 느낌이다. 영화감독의 문학성이 대가를 이룬 소설가와 겨눌 정도이니, 지극히 연극적인 건조한 연출로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연극적인 연출. 이 영화에서 류스케의 연출은 체호프적이다. 원작에서는 간단하게 제목 정도만 등장하는 체호프의 를 류스케는 적극적으로 극중으로 끌어들인다. 의 대사는 원래의 맥락에서 벗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황망한 마음... 성별 정정 절차를 마치고 법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여성이 된 건강한 사람이 여군으로 계속 군복무를 하는 것이 제한되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군 동료들의 불쾌감? 군사기 저하? 동료들이 존재를 불쾌해 한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다면 그 누구라고 가만히 있을까. 법적 성별이 여성이 된 사람에 대하여 '고환결손' 및 '음경상실'에 따른 심신장애를 이유로 전역 처분을 하는 것이 법리적으로 정당한지도 의문이고, 비슷한 논란이 있었던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성전환자의 군복무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는 역사적 증거도 충분했다. 분쟁에 명백한 선악은 없다지만, 변 하사님이 가려는 길이 옳다는 점은 적어도 나에게는 분명했다. 소장 접수부터 외국 사례 리서치까지 함께 본 입장에서, 충분히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되.. Being Alive_Adam Driver 요즘에는 1시쯤 퇴근하면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넷플릭스 한 편 보고 잔다. 얼마 전에도 기분 좋은 "칼퇴"로 영화를 한 편 봤다. . 무슨 일인지, 잠도 못자고 오랫동안 이 노래 근처를 서성거렸다. 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나를 너무 많이 알아버린 사람. M.I.A - Paper Planes 엠아이에이는 타밀계 영국인으로 유년기를 어머니와 함께 보냈는데, 아버지는 학생운동가로 스리랑카 내전에 관여하였다고 한다. 스리랑카 내전으로 인한 위험을 피하여 런던으로 이주하였고, 난민 신분을 얻어 생활하면서 예술대학을 졸업하여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난민과 전쟁, 빈곤에 관한 노래가 많다. 난민센터와 함께 마수드씨 난민소송을 1년 넘게 진행하고 있는데, 2020. 4. 29.자로 선고기일이 지정되었다가 최근 2020. 5. 13.으로 연기되었다. 변론종결된 이후 이미 여러 차례 선고기일이 변경되고 있다. 재판장님께서 진지하게 고심하고 계실 것으로 믿지만, 의뢰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마수드씨는 이미 지난 겨울부터, 난민을 인정받지 못해도 좋으니 그냥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하고 있다... 다정한 호칭_이은규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인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인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의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 이은규, 중 오늘은 보잘 것 없는 바람에 설레여 했다. 가끔은 이렇게 온통 글이 될 것 같은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덮인 책장처럼 얌전히 앉아서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지. 이은규의 시집 은 이제 우리 집에 없다. 누군가에게 줘버렸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이 시집에서는 세 편의 시가 마치 연작같은 느낌을 준다. , , .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속눈썹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건네준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건네받은 사람 온 곳을 모르므로 누구에게도 갈 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_이원하 뜻밖의 수확이 있는 날에는 기분이 좋다. 오늘의 수확은 이원하의 시집을 사게 된 것이었다. 별다른 목적도 없이 습관처럼 교보문고에 갔는데, 시집의 제목이 눈에 띄었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2020. 4. 1.에 초판이 발행된 따끈따끈한 신간이었다. 시는 고인물 대잔치이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동세대 시인을 발견하기 어렵다. 박준이나 오은 정도가 나와 가까운 편일까. 박준의 시는 얼마간 좋아했지만 자주 생각하는 편은 아니다. 친구랑 술김에 하소연하듯 시를 읽고 싶을 때가 있지만, 마음이 맞는 친구가 드물 듯이 코드가 잘 통하는 시도 드물다. 이원하 시집에는 귀여운 시가 많았다. 영원히, 말고 잠깐 머무는 것에 대해 생각해 전화가 오면 수화기에 대고 좋은 사람이랑 같이 있다고 자랑해 그 순간은.. 인질범_이영광 인질범 / 이영광 십 년을 쓰던 의자를 내다 버리는 아침 세상도 버려 온 내가 가구 따위를 못 버릴 리 없으니까, 의자를 들고 나가 놓아준다 의자도 버리는 내가, 십 년을 의자에 앉아 생각만 했던 사람을 버리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사람도 안고 나가 놓아준다 이것은 너른 바깥에 창살 없는 새 감옥을 마련해 주는 일 이제 그만 투항하여 광명 찾자는 일 늙은 의자는 초록 언덕 아래로 실려 가고 고운 얼굴, 풍악(風樂)처럼 공중을 날아간다 잘 가라, 탈출이라곤 모르던 인질아 인사하면 잘 있어라, 포기라곤 모르던 인질범 답례하며 사정을 말하자면, 내게는 겨우 새 의자가 하나 생겼을 뿐이다 사정을 숨기자면, 다시, 투항이라곤 모르는 인질범이 되었을 뿐이다 오랜만에 좋은 시인을 발견해서 며칠을 우려먹었다. 시를 읽던..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