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는 척을 참 좋아한다. 음악이나 영화, 문학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 꺼내기를 즐겨한다. 새로 만난 사람들에게는 지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오래 본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적은 양의 지식으로 이야기를 부풀려 하는지 이미 간파하고 있다.
사실 문화나 예술에 대한 내 지식은 매우 협소한 편인데, 그래서 아는 척을 위한 내 전략은 대부분 훈고학적이다. 평론을 위한 이론이나 참신한 관점이 없기 때문에, 그저 오랫동안 향유한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지식으로 뉴비들에게 어필하는 식이다. 화제가 되고 있는 작가나 영화감독에 대해 “근데 그 사람은 초기작들이 더 좋아”라는 식으로 말하는 거다. 아무래도 잘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 이 사람은 그 작품들을 초기부터 꿰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대단한 전문가라는 인식을 갖게 되지만, 사실은 그저 나이가 많이 들었을 뿐이다. 일개 딜레탕트가 훈고학적 전문성 외에 달리 또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오늘, 갑자기 다시 듣게 된 KEANE의 음악은 내 ‘훈고학적 아는 척’에 최적화 되어 있다. “KEANE은 아무래도 1집이 가장 좋지”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1집이 왜 2집보다 좋은지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 그냥 왠지 그렇게 말하면 전문적인 것처럼 보이니까. 뭐, 1집 수록곡들을 더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다. 2집에서 좋아하는 곡은 두 개. <Run with me>랑 <It’s not true>인데, 둘 다 앨범 전체 분위기에서 보면 좀 우울한 편. 그 중에서 <It’s not true>는 가사를 참 좋아했다. Friends you once loved don’t know you… 밤에 들으면 좋은 우울한 가사들.
우울하고 비관적인 가사들 끝에 위로의 구절이 나온다.
그러니 그런 말 하지마 So don’t you say
네 안에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There’s something in your core that can’t be saved
왜냐면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Because it’s not true.
그리고 내 마음의 모든 가을이 너를 그리워해And every autumn of my heart is missing you
아, 정말 멋지지 않나? 내 마음의 모든 가을이라니… 너를 그리워하는 내 마음의 모든 가을이라니…
근데 오늘 다시 가사를 음미하면서 듣다보니 autumn이 아니라 atom이다. 가사집을 찾아보니 역시 atom이 맞단다. 좋아하는 가사 구절에 관한 몇 년 간의 오해가 그렇게 풀렸다. 계절과는 관계 없는 가사를 나는 그렇게도 가을마다 찾아 들었다. 창조적 오역?
그래서 나는 계속 autumn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작품이란 작가를 떠나는 순간 감상자가 소유물이 되는 것이기도 하니까. 마음이 허한 가을에 이 노래를 들어야지. 내 마음의 모든 가을이 너를 그리워하는 오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