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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지문 _ 이은규

바람의 지문  _ 이은규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인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인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의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


그래, 맞아. 조급해하지 말아야지. 앞서지도, 뒤쳐지지도 말고 무엇도 재촉하지 말아야지. 보이지 않는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감정이 가난하여 시를 훔친다. 파산한 은유로 위법을 감춘다.

손끝으로 문장을 더듬으며, 나는 오늘의 호들갑을 반성한다. 무엇을 기대했던가. 끝도 없는 하강 끝에 산을 닮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