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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_ 식후에 이별하다

식후에 이별하다 / 심보선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는 소리

기어이 들리고야 마는 소리

단단한 이마를 뚫고 맘속의 독한 죽을 휘젓는 소리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착한 그대여

착한 그대여

아직도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열을 셀 때까지 기어이 환한가

천 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그 질퍽한 어둠의 죽을 게워낼 줄 모르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심보선의 시집은 모두 누군가에게 선물로 줘버렸거나, 헌책방에 팔아버렸다. 한 때는 시집의 소유가 내 감성의 증명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누군가의 생일엔 잘난 척 시집을 선물하곤 했다. 그러나 사는 게 이렇게 무신경할 바엔 시집이 다 무슨 소용일까? 이따금 웹툰이나 보는 것이 내 감정활동의 전부이다. 올 해 들어서 단 한 편의 시도 새로 읽지 않았다.

도대체 문학은 요만큼의 위안도 되지 않는다. 한 편의 시보다 위장의 포만감이 풍요롭다. 실컷 울 수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미친척 웃어버릴 수도 있다. 부유하는 나는 연꽃도 뿌리가 있음을 모른다.

몸에 낙서하고 싶은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