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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읽기를 권함

서문 읽기를 권함.

독서는 고된 일이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글자의 흐름 속에서 정신을 놓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건 고작 눈과 손가락뿐이라지만, 고도의 집중력으로 온몸의 기력을 쏟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잡생각의 수렁에 빠지기 일쑤다. 그렇게 서너 시간 집중해서 책을 읽고 나면 몸 곳곳이 쑤셔온다. 물론 집중해서 읽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게다가 경청할 만하다고 알려진 책들을 찾다보면 어찌나 두껍고 무거운지, 시작하기 전부터 엄두가 안 나는 때도 많다. 마음먹고 책을 읽겠다고 책상에 앉으면 30분도 지나지 않아 목과 허리가 아파오는 것 같다. 결국 침대에 엎드려 읽다가, 다시 누워서 읽다가, 벽에 기대어 읽는 식으로 정신없이 굴러다니게 된다. 책을 편하게 읽는 방법이 없을까. 빔프로젝터로 천장에 영화를 쏘듯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도록.

책 읽기가 고되고, 또 요즘엔 시간도 많지 않다보니 새로운 독서습관을 하나 얻었다. 바로 “서문(만) 읽기”. 좋은 습관인지 나쁜 습관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양면이 다 있을 것이다. 읽고 싶은 책을 도서관에서 집어오면, 나는 서문을 꼼꼼히 정독한다. 때로는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울 것이고 때로는 예상과 전혀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서문이 재미있어도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는 법은 없다. 서문에 더해서 흥미가 가는 부분(이 있다면) 위주로 한 두 챕터 정도 발췌해서 읽고는 치워버린다. 30분이면 족하다.

그런 독서 같지도 않은 독서로 내게 남는 건 저자의 문제의식과 희미한 해결의 실마리 정도? 그나마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터무니없는 오독을 일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서문 읽기의 최대 장점은 경제성이다. 책을 읽기 위해 들이는 수고와 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식을 비교할 때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지점이 바로 서문(더하기 한 챕터)까지이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무수히 많은 정보와 지식이 널려있다. 그 중에서 내가 살면서 접하게 될 부분은 극히 편협한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전문분야를 깊이 알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방대한 세계를 힘껏 쓸어담아야 하지만, 얉고 넓게 알기 위해서는 사소한 관심으로도 충분하다. 서문 읽기는 말하자면, “가성비” 좋은 투자가 된다.

그러니 현대인들에게는 서문 읽기를 권할만 하다. 고전 한권을 진득하게 독파해야만 사고력이 싹튼다고? 그런 건 체력, 시간, 집중력 넘치고 뇌가 팽팽 돌아가는 10대에 해야 할 독서다. 사람은 20대가 넘어가는 순간 벌써 뇌의 기능이 감퇴하기 시작한다. 살면서 축적한 넓은 지식에서 오는 통찰력으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하루 30분만 서문을 읽어도 우리사회에서 문제되는 대부분의 논의를 눈꼽만큼씩 알 수 있다.

여전히 미심쩍은가? 한동안 유행하던 TED 동영상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많은 TED 강연자들은 평생의 업적을 10분 남짓한 동영상으로 소개하고, 청자들은 그 간결하고도 통찰력 있는 지식에 열광한다. 잘 쓰여진 책의 서문도 마찬가지다. 다만 TED보다 방대한 주제를 원하는 방식으로 읽을 수 있도록 글로 제공하고 있을 뿐.

 

2015. 8.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