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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해변에서 혼자> 홍상수, 김민희

밤의 극장에서 혼자 봤다.

 

홍상수 영화가 맨날 똑같지 뭐, 하는 마음으로 들어가서 또 재밌게 봤다. 홍상수 근작 중에는 가장 좋은 것 같다. 특히 김민희의 연기가 아주아주 좋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쿡쿡 찌른다. <아가씨>에서도 그랬지만, 김민희는 히스테릭하게 소리지를 때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기이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다.

 

술냄새 진동하는 단체씬은 여느때나 다름없고, 홍상수 특유의 뜬금포 줌인 기법도 보는 맛이 쏠쏠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특히 좋았던 이유는 드물게도 여-여 케미가 매우 훌륭하기 때문이다. 전작들 중에 이런 적이 있었던가? 그동안 여러 뮤즈가 주인공으로 나왔지만, 대부분 홍상수분신 또는 미니홍상수 또는 홍상수워너비 사이를 뱅뱅 맴돌 뿐이었다. 달리 말하면, 홍상수의 전작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홍상수였다. 그러나 이번 김민희는 진짜 주인공이다. 그리고 김민희-서영화, 김민희-송선미의 케미는 나머지 남배우들과의 관계보다 훨씬 돋보인다. 김민희-서영화는 이상하게 중독적이면서도 편안하고, 김민희-송선미는 묘하게 긴장되면서도 자연스럽다. 비로소 홍상수의 세계가 자의식으로부터 파트너에게로 확장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남자들도 느낌이 조금 다르다.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이 후기작으로 갈수록 점점 더 ‘인간’이 된 건 사실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조금도 불편함이 없다. 처음 권해효가 등장했을 때의 약간의 긴장감을 제외하면, 모두 찌질함 없는 젠틀맨이 되었다. 홍상수맨에 깊은 애착을 갖고 열심히 경멸했던 나로써는 아쉬울 만도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사랑은 사람을 얼마나 바꿔놓는 것일까.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얄팍한 궁예질로 만족하기로 한다.

 

다만, 홍상수의 변명은 사족이다. (물론 홍상수의 변명이 아니라 김민희의 동요하는 내면이라고 주장하면 할 말은 없으나) 불륜이 불륜이지 뭐. 대단한 로맨스일 일도 악담을 퍼부을 일도 아니다. 굳이 찾아와 이 영화를 본 관객에게 설교할 것도 아닐 뿐더러, 변명할 일이 아니라는 말로 정작 변명하고 있지 않은가. 쿨한 척 하는 예술가의 쫄보근성을 엿본 것 같아서 다소 초라한 느낌이었다. 그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성취에 집중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예컨대 홀로 화면을 채우는 것만으로 관객을 외롭게 만드는 김민희의 공허하면서도 매력적인 눈매같은 것 말이다.

 

홍상수 영화를 정색하고 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상을 여럿 받았어도 마찬가지. 가끔 홍상수를 영화의 신처럼 추앙하는 사람을 보면 사실 나는 안목을 의심하게 된다. 그의 영화는 때로는 우습고 때로는 경이롭다. 그러나 어느 모로 봐도 자의식 과잉의 통속적 예술가일 뿐이다. 두 시간 피식대다가 마음을 울리는 한두 씬 건지면 그만이다. (예를 들어, 해변에 홀로 누운 씬은 너무 외롭고 아름다워서 충격받을 정도였으나, 복면맨의 등장이나 큰절씬은 좀 투머치 유치뽕이었다.) 나는 홍상수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팬이지만, 그 팬심은 레드벨벳을 향한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영화는 영화로 즐길 수 있도록 홍상수맨은 이제 그만 나타났으면 좋겠다. (불륜이라는 단어만 보면 날뛰는 성난 군중은 말할 것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