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T의 이름을 들었다.
나도 내가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 T가 나에게서 무엇을 보려 했었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는 오해와 의도된 말실수 사이에서 나도 T도 길을 잃었다. 그저 그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의 생각을 조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심한 기시감을 느꼈다. 만약 죄책감이 죄악감과 책임감을 더한 것이 맞다면 죄책감이라고 표현해도 되겠다.
조급한 마음이 들 때면 의도적으로 게으름을 부린다. 마음속으론 1분이 급해도 괜히 느긋한 걸음을 떼거나 커피를 시키거나 하는 식이다. 애초부터 길게 본다는 마음이었다. 어차피 며칠 새에 그 사람이 사랑에 빠지거나 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나는 초조하게 커피를 주문했다. 숲을 흔드는 빗소리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나는 낭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막차 시간을 잊었다는 문장이었나. 같은 시인을 좋아했지만 다른 시와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20년 이상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좋아하는 구절이 같아도 이상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적잖이 실망하는 내가 있었다. 은밀한 기대는 소리조차 나지 않은 채 부서졌다. 막차 시간이 생각나지 않는다. 매일같이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던 길이지만 지금은 버스 번호조차 기억할 수 없다.
“그런데요, 혹시 막 밝고 그런가요?”
“이 세상에 밝은 시 같은 건 없어.”
가장 밝고 희망찬 시에도 서글픈 결핍이 내재해 있다. 그래서 시를 찾는 자들은 항상 어딘가 결핍된 사람들이다. 그 사람은 무슨 결핍에 그리도 여러 시를 전전하는 것일까. 이자도 나오지 않는 시, 모으고 저축해서 무엇에 쓰려는 것일까.
T의 이름이 들리면 귀를 닫고 싶다. T가 눈앞에 나타나면 내 안에 어떤 것이 시들고 만다. 내 삶의 원흉, 사랑의 적! 하지만 오늘도 나는 은밀하게 T와 연관된 화제를 입에 올린다. T의 이름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하면서.
T의 이름에는 사랑이 결핍돼 있고, 그래서 시와 잘 어울린다. T를 생각하면서 행간을 헤매는 밤, 세상엔 밝은 시가 없어서 T의 이름이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