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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밤에 하는 생각

요 며칠 강박적으로 책을 읽는다. 거의 소설이지만 에세이랑 시도 좀 읽고 있다. 어쨌든 비문학은 거의 없다. 오늘은 백수린의 데뷔 소설집,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 권여선 신작 에세이를 읽었다. 뭐라도 읽고 있지 않으면 자꾸 자라나는 망상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열심히 눌러담는다. 그러니 오늘도 잠을 못이루는 것은 순전히 그 날의 밤산책 때문이다.

백수린님은 성실한 작가인 것 같다. 신비로운 재능을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소설은 많지 않지만, 게으른 소설도 거의 쓰지 않는다. 노동하는 자의 세속적 성실함으로 꾸준히 좋은 소설을 펴내는 성실한 사람의 느낌. 자기복제와 반복은 단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두 권의 단편집을 읽으면서도 거슬리는 소설이 한 편도 없다는 건 놀라울 정도의 QC이다.

버닝을 보고 헛간을 태우다를 읽었다. 하루키는 하루키고 이창동은 이창동이다. 시나리오는 거의 새로 쓴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버닝이 표현하려는 날선 감정들은 하루키 원작과는 무관하다. 오직 스티븐 연의 서늘한 섬뜩함만이 하루키로부터 차용한 것인데, 그 연출은 오히려 너무 친절해서 아쉬웠던 부분. 영화와 단편소설의 어쩔 수 없는 차이겠지만, 결과적으로 버닝은 이창동의 독창적 산물인 셈이다. (사실 내가 내심 가장 흥분한 부분은 불타는 하우스의 비주얼었다. 미래의 방화범의 각성을 부추기는 영화이다.)

F의 비판은 결국 이해할 수 없었다. 여주는 굉장히 매력적인 주체로 묘사되었고, 남주의 각성을 위해 허무하게 소비되었다는 주장도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가 무의미하기 소비되었지) 이창동이 오아시스부터 욕을 좀 먹은 건 사실이고, 유아인에 대한 반감 얘기도 들었지만, 좀 억지스럽다. 오히려 하루키의 원작이야말로 진짜 미소지니적 묘사를 담고 있는데, 이창동이 바꾼 부분은 매우 전향적인 것이다.

그리고 권여선 에세이. 나는 역시 권작가님을 사랑한다. 찬장이 모셔둔 글렌피딕 까서  혼자 홀짝홀짝 마시면서 읽었다. 무턱대고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그리고 오늘은, 자라나는 망상을 멈추려고 오랜만에 시를 읽었다. 완전히 실패했다. 나는 너무 예민하고 자기중심적이다. 너의 모든 시그널이 나를 향한 것으로 들린다. 그러다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젖은 베개를 털어 말리고 눅눅한 옷가지에 볼을 부비다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쓰다 만 편지를 세탁기에 넣고는 며칠을 묵혔다

내일은 아주 긴 산책을 할 것이다. 나의 이 터무니없는 생각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한발한발 천천히 곱씹어볼 것이다. 너의 아름다움이 잔뜩 묻은 머리를 이고 나가서, 툴툴 털어 말리고 올 것이다. 영화 한 편 끝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