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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명절의 끝

이제껏 도약을 꿈꿔본 적 없다
다만 사각형의 문들이 나를
공허에서 공허로
평면에서 평면으로 옮겼다 – <전락>, 심보선

신기한 마음이 들 때에는 글을 읽는다. 때로는 타인의 글이 나보다 더 내 마음을 잘 아는 것 같다. 명절 연휴는 평범하지 않은 듯 평범하였으나, 오가는 길에 글이 풍성해서 좋았다.

사람은 서른을 넘으면서 취향이 고정되어 버린다고 했다. 그 전까지는 항상 새로운 노래, 새로운 작가, 새로운 영화에 목말라 하지만, 서른을 넘기면 전에 듣던 노래, 책, 영화를 다시 찾는 게 편해진단다. 낯설고 새로운 것은 피곤해지고, 익숙한 옛 것은 반갑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만히 살다가는 순식간에 뒤떨어진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니, 의식적인 노력으로 새로운 것들을 찾으며 살아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다.

반쯤 읽다 만 박준이 피곤해져서, 문득 심보선의 시를 찾았다. 소장했던 시집은 모두 어딘가에 넘겨버렸으니 누군지 모를 이의 블로그를 기웃거리는 수밖에 없다. 그럴듯한 서재를 갖기엔 거추장스러운 삶이라서 하나둘 책을 처분한 일이 이런 날에는 또 아쉬워진다. 살면서 두 번쯤 서재를 비웠고, 그 후로 책장을 새로 사지 않았다. 내가 몰래 접어둔 귀퉁이와 마음 속 밑줄들은 지금 누구의 서재에 잠들어 있을까.

언젠가 우리의 서재를 마련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기쁨과 슬픔을 가득 담은 책들 차곡차곡 채워 넣을 것이다. 거추장스럽고 잡스러운 글들을 아득바득 끌어안고 보란 듯이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노년의 어느 나른한 오후, 서재에 함께 기대어 오늘의 신기한 마음을 손끝으로 더듬어 볼 것이다. 그런 날이 있었지, 하면서 기억도 나지 않을 대화들을 추억할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새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서재를 짓는 날이 오면, 심보선 시집은 하나 꽂아두어야겠다.

온 세상을 슬픔으로 물들이게 하려고
우는 아내가 식탁 모서리를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마술이다 - <아내의 마술>, 심보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