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나의 침묵> _ 다르덴 형제
아마도 <로나의 침묵>을 고작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한다면 애석한 일일 것이다. 벨기에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위장결혼을 하는 알바니아 여자, 로나의 이야기 속에는 계급, 성별, 민족 등 다양한 층위에서 교차하는 사회적 정체성 속에서 분투하는 삶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회의 억압적 실체를 애써 보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 정체성이 사상되어, 그저 사랑 없는 계약 결혼에서 뒤늦게 알게 된 상대방의 참된 매력이라는 진부한 전개만 남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진부한 로나의 계약결혼이 시민권과 계급, 여성의 삶과 치유라는 사회성을 경유하면서 풍성한 의미를 획득하며 깊은 울림을 준다.
시민권 획득을 위해 로나가 결혼한 상대방은 마약중독자 클로디이다. 약물남용으로 죽어버릴 것을 기대하며 택한 중독자였건만, 어느 날 클로디는 약을 끊겠다고 결심하며 로나의 도움을 요청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클로디가 어서 죽어버리는 게 낫건만, 로나는 클로디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할 수 없다. 로나만이 구해줄 수 있다며 매달리는 클로디에게 로나는 서서히 마음을 열어간다.
여기서 다르덴 형제의 장면은 거인의 걸음처럼 성큼성큼 뛰어다닌다. 보통의 영화문법이 일상을 잘라내고 중요한 사건들을 묶어낸다면, 이 영화에서는 중요한 장면을 생략하고 다만 일상을 나열한다. 사건의 전개는 일상 속에서 밑반찬처럼 아무렇지 않게 던져지는 대사에 의해 진행된다.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달아나는 카메라의 발걸음을 따라 관객의 마음이 쿵쿵 내려앉는다.
그래서 나는 강렬한 사회적 리얼리즘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사랑 이야기로 읽고 싶다. 시차를 두고 찾아온 사랑과 양심의 거대한 의미가 공백에 차오르는 순간, 그리하여 클로디의 행동과 말투 하나하나가 변화된 문맥 속에서 재배치되는 순간, 그 안타까움과 돌이킬 수 없음은 로나의 심장을 한껏 뒤흔들어 놓는다. 관객은 그저 로나의 공황을 힘겹게 지켜볼 뿐이다. 그러나 이 셰익스피어적 엇갈림은 시민권의 획득(으로 표상되는 계급상승)을 위해 스스로를 이용했던 전략적 협상자에서 무기력하게 이용당하는 타자로 전락하고 마는 한 여성의 비극적 삶을 통해 극대화된다. 그 비극의 실체는 신의 섭리나 우연적 엇갈림이 아닌 사회적 억압의 구체적 현실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사랑(의 실패)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사실주의 멜로드라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다만 로나의 침묵이 길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그러려면 모두가 침묵하지 말아야 하겠지.
* 내가 요즘 즐겨 읽는 작가, 권여선의 작품 중에 <사랑을 믿다>가 있다. <로나의 침묵>에 비한다면야 비극이랄 수는 없는 줄거리지만, 사랑(보다는 진실이라고 쓰고싶다)을 드러내지 않고 감춘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녀의 소설은 친절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지만, 드러나지 않는 것에서 오히려 아름다움을 보게 한다. 검은 수면 아래의 진실을 엿보는 순간, 그 여운은 눈앞에서 흔드는 찬란함보다 오래간다.
2010. 9. 8.
아마도 <로나의 침묵>을 고작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한다면 애석한 일일 것이다. 벨기에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위장결혼을 하는 알바니아 여자, 로나의 이야기 속에는 계급, 성별, 민족 등 다양한 층위에서 교차하는 사회적 정체성 속에서 분투하는 삶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회의 억압적 실체를 애써 보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 정체성이 사상되어, 그저 사랑 없는 계약 결혼에서 뒤늦게 알게 된 상대방의 참된 매력이라는 진부한 전개만 남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진부한 로나의 계약결혼이 시민권과 계급, 여성의 삶과 치유라는 사회성을 경유하면서 풍성한 의미를 획득하며 깊은 울림을 준다.
시민권 획득을 위해 로나가 결혼한 상대방은 마약중독자 클로디이다. 약물남용으로 죽어버릴 것을 기대하며 택한 중독자였건만, 어느 날 클로디는 약을 끊겠다고 결심하며 로나의 도움을 요청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클로디가 어서 죽어버리는 게 낫건만, 로나는 클로디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할 수 없다. 로나만이 구해줄 수 있다며 매달리는 클로디에게 로나는 서서히 마음을 열어간다.
여기서 다르덴 형제의 장면은 거인의 걸음처럼 성큼성큼 뛰어다닌다. 보통의 영화문법이 일상을 잘라내고 중요한 사건들을 묶어낸다면, 이 영화에서는 중요한 장면을 생략하고 다만 일상을 나열한다. 사건의 전개는 일상 속에서 밑반찬처럼 아무렇지 않게 던져지는 대사에 의해 진행된다.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달아나는 카메라의 발걸음을 따라 관객의 마음이 쿵쿵 내려앉는다.
그래서 나는 강렬한 사회적 리얼리즘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사랑 이야기로 읽고 싶다. 시차를 두고 찾아온 사랑과 양심의 거대한 의미가 공백에 차오르는 순간, 그리하여 클로디의 행동과 말투 하나하나가 변화된 문맥 속에서 재배치되는 순간, 그 안타까움과 돌이킬 수 없음은 로나의 심장을 한껏 뒤흔들어 놓는다. 관객은 그저 로나의 공황을 힘겹게 지켜볼 뿐이다. 그러나 이 셰익스피어적 엇갈림은 시민권의 획득(으로 표상되는 계급상승)을 위해 스스로를 이용했던 전략적 협상자에서 무기력하게 이용당하는 타자로 전락하고 마는 한 여성의 비극적 삶을 통해 극대화된다. 그 비극의 실체는 신의 섭리나 우연적 엇갈림이 아닌 사회적 억압의 구체적 현실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사랑(의 실패)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사실주의 멜로드라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다만 로나의 침묵이 길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그러려면 모두가 침묵하지 말아야 하겠지.
* 내가 요즘 즐겨 읽는 작가, 권여선의 작품 중에 <사랑을 믿다>가 있다. <로나의 침묵>에 비한다면야 비극이랄 수는 없는 줄거리지만, 사랑(보다는 진실이라고 쓰고싶다)을 드러내지 않고 감춘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녀의 소설은 친절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지만, 드러나지 않는 것에서 오히려 아름다움을 보게 한다. 검은 수면 아래의 진실을 엿보는 순간, 그 여운은 눈앞에서 흔드는 찬란함보다 오래간다.
2010. 9.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