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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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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접어둔 책장 귀퉁이를 책임져야 하는 시간이 온다. 번복할 것이 많아서 장황해지고 마는 그런 나이가 온다. 아무리 오랫동안 책을 눌러두어도 접었던 빗금은 말끔해지지 않는다. 나이테처럼 조밀해지는 빗금들 사이로 무엇을 새롭게 새길 수 있나.


몇 개월만에 다시 펼쳐든 시집에 새롭게 몇 개의 귀퉁이를 접고, 너저분하게도 접혀있던 귀퉁이를 펼친다. 어려 번 읽고 또 읽은 글귀들이 낯선 이가 되어 박힌다. 이제 내가 읽은 시에는 온통 그 뿐이다. 다시는 예전에 읽은 시를 떠올릴 수 없다. 그러니 오늘은 무슨 시를 꾹꾹 눌러써야 하나. 아무리 시를 눌러써도 종이는 더러워지기만 하는데. 짐짓 쾌활하게 웃어본들 나의 귀퉁이는 전락을 일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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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완전하게 태어났다. 내 팔은 원래 네 개였는데, 실수로 두 개만 갖고 왔다. 두 팔로 나를 안고 등을 쓸어내리며 괜찮다고, 괜찮다고,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내 팔 어디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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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의 시간에는 욕망이 춤춘다. 잊었던 전화번호를 누르고, 떠났던 곳을 다시 찾고, 잃어버린 기억을 곱씹는다. 이름도 모를 주인에게 수작을 걸고, 구부러진 길을 졸졸 따라다니다가, 수치심도 없이 몸짓을 흉내낸다. 우리가 터무니 없는 망상을 하고, 기억을 왜곡하는 것은 산 자의 시간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자의 시간이 반드시 온다. 네온사인도 전봇대도 없는 곳.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면서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시간. 나는 무덤을 여행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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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얼렁뚱땅 1학년 1학기가 끝났다. 얼렁뚱땅 결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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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다는 말은 접어두기로 한다. 어른이 되면, 접어둬야 하는 말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하루에 절반쯤은 천국, 절반쯤은 지옥에 산다. 그러니 행복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한동안은 지옥에만 살아야 한다. 천국을 상상한다고 지옥이 천국이 되나.

가능하면 멀리, 떠나고 싶다. 망상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