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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문의 우울

남을 보여주기 위해 쓰지는 않지만, 누군가 읽을 경우를 감안해서 쓴다. 내 친구는 언젠가 일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자신의 일기에조차 솔직할 수 없는 우리 처지에는 쓴웃음이 났지만, 그 후로도 이보다 나은 정의는 들어본 바 없다. 언제나 누군가에게 들킬 상황을 의식하며 쓴다. 과시적인 태도로 감정을 과장하고 생각을 부풀린다. 무수한 자기 검열과 혼자만 아는 상징으로 범벅이 된 옛 일기를 읽고 있자면 스스로에게 솔직하기란 몹시도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지만, 온전한 진실을 전달하지도 않는다. 변명답지 않게 변명하기 위해 세심하게 말을 고르는 나를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좀 다를 줄 알았다고, 보다 솔직해지면 어떠냐고 했다. 나를 마음껏 할퀴고 상처를 주고 싶었다고, 스스로를 비겁하고 무책임한 사람으로 느끼게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그 사람은 마음을 바꿔먹었다지만, 그 본래 의도는 완전히 성공했다.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기분에 친구 집을 향했고, 우리는 밤새 검은 술을 마셨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처음부터 잘못된 건 없어. 너만 없으면 돼.”

 

블루문이다. 그 사람이 보내준 사진에 내가 상상한 낭만적인 보름달은 없었다. 따뜻한 얼그레이 라떼를 마시면서도 마음은 흔들거렸다. 실은 블루문은 낭만과 거리가 멀다. 불길하고 재수 없는 두 번째 보름달의 기만적 이름일 뿐이다. 그래도 나는 낭만을 상상한다. 파랗게 빛나는 둥근 달을. 제 아무리 시정잡배의 싸구려 감상이더라도 가끔씩은 생이 담기는 법이다. 허망한 조소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그렇게 블루문은 누구도 관심 주지 않는 날에 나타나 홀로 조용히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상념은 둥둥 그 날 밤에 머문다. 그 사람의 목소리가 내 귀를 타고 들어와 온몸을 휘감고 여기저기 불을 켜댔던 그 밤. 목련꽃 같던 표정을 보며 손바닥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었던 그 밤. 그래서 삶이란 그 모든 졸렬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매 순간의 빛을 하나의 선물로 기꺼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 사람이 읽었던 시에는 조금도 내가 없었지만, 내가 읽었던 시는 모조리 그 사람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일기장에 시를 꾹꾹 눌러 쓰던 밤에는 가슴이 머저리처럼 두근대기도 했으니까.


Don't change a hair for me, not if you care for me... 전세계 600명이 넘는 가수가 불렀다지만, 나는 여전히 쳇 베이커의 우울한 애틋함이 제일 좋다. , '나도 잘은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