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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보다 바다

마음이 산란할 땐 불을 꺼둔다. 환한 빛은 부끄럽다. 방에 있는 모든 불을 다 껐지만, 밤새 창으로는 가로등 빛이 들이쳤다. 주홍빛 그림자가 옹색하고 어두운 방에 있는 가구들의 배치를 드러내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냉장고의 검은 실루엣이 보인다. 문득 손을 뻗어도 냉장고가 닿지 않는다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진다. 작은 몸 하나로 이렇게 넓은 공간을 꿰차고 살아가는 인간이 혐오스럽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스트레칭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며 불평했던 그 원룸이다.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열대야도 아닌데 밤새 뒤척이기만 했다.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후회하는 일들이 늘어만 갔다. 좋아하던 것들은 전부 사라져만 가는데, 새로운 것을 좋아하기에는 내 머뭇거림이 너무 컸다. 나를 훈육하고 자라게 만들었던 그 때 그 사람들은 어디서 쥐도 새도 모르게 미아가 되어버린 것일까. 내가 밑줄 그어 강조했던 말들은 도대체 뭐였기에 나는 엉뚱하게도 그 흔한 유희로 제멋대로의 오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권여선 작가를 모른다. 하지만 그가 술꾼일 거라고 생각한다. 글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가 좋아 여기저기 부지런하게도 선배들을 따라다녔을 그를. 사람들이 제각기 신발을 구겨 신고 구석구석 집으로 흩어지는 동안에도 마지막까지 떠나지 못해 술집 앞 길거리를 배회했을 그를.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술맛보다도 소름끼치게 맛있는 안주를 찾아 입맛을 다셨을 그를. 아마도 신나거나 활기찬 술자리는 못되겠지만, 적어도 그 앞에서 작위적인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었으리라.

 

지난 나흘 동안 매일 밤 술을 마셨다. 첫 날은 텐트에서, 둘째 날은 집에서, 어제는 가평의 한 팬션에서. 오늘도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속은 메슥거리고 몸에선 미열이 났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기분이 점점 좋아졌으니 오늘도 마셨다면 하늘을 뚫었을지도. 뚫지 않은 것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기분이 좋은 나는 어딘가 음흉한 데가 있다.

 

어제는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최근의 침울했던 나를 생각하면 기적적인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그동안 누구에게도 토로하지 않았다. 치사하지 않냐고, 허무하지 않냐고, 강에도 산에도 바다에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마주하려는 눈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 것이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산보다 바다가 좋다고 했다. 어릴 적 집 앞에 산이 있었으니까. 익숙한 것에는 환상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만약 바닷가 앞에서 살았더라면 산을 훨씬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의 명쾌함이 좋았다. 그 사람의 태도에는 머뭇거림이나 모호함이 없다. 명랑한 목소리는 쉴 새 없이 농담을 꺼내놓았다. 집 앞에 산이 있다면 산을 좋아해버리고, 바다를 보면 바다가 궁금해지는 나는 그 사람에게 이방인일 지도 모른다. 멍청한 웃음을 던지다가도 틈만 나면 이내 침묵하려는 종자들은 끝내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

 

바다로, 산으로, 강으로. 흔들리는 나무와 부서지는 파도를 보고 싶다. 흐르는 강물에 발 담그고 신경질적으로 첨벙이고 싶다. 첨벙 첨벙, 첨벙이다 옷이 흥건히 젖어버리면 그 사람은 내 장난끼를 나무라며 머리를 털어준다. 강에 대고 뭐라 소리칠 필요도 없다. 눈이 마주칠 때 천진하게 웃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