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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100915 전화_

  그 사람이 내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 맞췄다. (몇 달 만인데도) 전화를 받자마자 뭐해요, 라고 물었더니 문원이구나, 하고 대답해 주었다. 서운했던 감정도, 침울해 있던 저녁도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안 그래도 5분 전에 생각났었다는 입 발린 말에도 잘도 넘어가 버렸다. 요즘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내가 걱정해주지 않아도 얼마든지 여기저기 잘 걸어 다닐 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소식을 들을 수 없을 때면 종종 떠오르곤 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피곤한 인상이 신경 쓰였는데, 요즘엔 전처럼 좀 장난끼 있게 웃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사악하던 송곳니.

  누나와 추석에 할머니네 갈 약속을 잡았다. 밤늦은 전화였는데도 설계중이라 바쁘다고 했다. 요즘에도 야근을 많이 하는 걸까. 바뀐 번호를 가족에게 알려주는 것도 잊을 정도니 바쁘냐고 물어봐야 입만 아프다. 스트레스에 약한 체질에 탈 없이 해나가는지 모르겠다. 학교는 다닌댔나? 서로에게 너무 무심한 건 사실이다. 그치만 그런 사이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다.

  그 사람이 보낸 하루를 듣고 있었더니 어느새 졸음이 밀려왔다. 깜깜해진 풍경에 화들짝 놀란 놀이터의 아이가 된 기분이다. 다른 사람의 하루를 들어서 두 배로 산 날이 된다면 어떨까. 그 사람이 매 순간 느낀 감촉이나 향기, 당혹감 같은 것들을 내게 말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강한 질투를 느꼈다. 점심 메뉴와 만난 사람, 읽은 문장 같은 것들은 그 사람의 하루를 재구성하기엔 앙상하다.

  그러고 보면 요즘엔 전화가 나를 사람들과 교통시키는 유일한 길인 모양이다.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 사람의 표정이나 기분을 그려본다. 내 전화에 신이 났을 거라고 상상하면서 들으면 그 목소리도 그렇게 들린다. 요즘처럼 자의식이 저조한 시기에는 눈을 마주치고 말할 때보다 낫다. 그런데 왜 그 사람과 말할 때엔 전화라서 억울했을까. 검은 방. 적막한 공기. 표정. 왜소해진 숨소리 같은 걸 잔뜩 표내지 못하고 혼자 우물거리는 게 싫었다. 알 길 없는 전화 속 목소리만으로 금새 눈치 채고 나를 위로해주지 않아서 괜히 혼자 서운했다. 스물넷이나 먹어서 아직도 이러고 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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