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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마담 보바리

그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정말 하잘것없고 공허한 경험이라는 사실은 우리 인생을 이어주는 사슬에는 항상 어느 한 고리가 빠져 있고 객관적 무의미와 순전히 주관적인 의미가 안겨주는 서글픔이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아르놀트 하우저

"보바리는 바로 나다."라고 플로베르가 말했을 때, 그는 자기 경멸과 더불어 보바리에 대한 얼마간의 애착을 담으려 했을 것이다. 조야한 일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어딘가 낭만적 전망을 꿈꾸며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숙명이라면, 누군들 한번쯤 보바리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현실로부터 도피해 다른 어떤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는 것이 보바리즘이라면, 소설이라는 형식이야말로 이미 보바리즘적 욕망을 체현하고 있는 구성물이다.

교양소설이 주관적 자아를 사회와 조율해 나가는 과정을 표현한다면, 플로베르가 그리는 것은 그 사회적 적응의 낙제생이 추락하는 과정이다. 전자가 얼마간의 순응을 전제한다면, 보바리는 반항과 도피를 통해 사회적으로 추방당한다. 플로베르의 리얼리즘은 보바리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구조와 욕망을 구체적으로 포착하는 데에 성공한다는 점에서 발자크, 스탕달의 계보를 잇고 있지만, 동시에 이를 심리소설의 차원으로 격상-혹은 격하하고 있다. 과도하게 할애된 보바리의 내적 동요에 대한 묘사는 보바리즘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숙명 중의 하나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보바리는 왜 환상을 꿈꾸었는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들은 누구인가. 왜 이들은 현실에 건강하게 발붙이지 못하고 언제나 황홀한 순간을 고대하며 살아가는가. 플로베르에게 이는 수도원에서 보낸 보바리의 유년시절 - 각종 소설에 빠져 살았던 - 의 문제로 축소되어 있다. 세나르의 저 유명한 변론처럼 여성의 허영심이 "너무나도 빈번히 실시되고 있는 그릇된 교육"의 문제라는 주장에 베티 프리단은 무슨 말을 했을까. 사회적 욕망의 건강한 발현을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어떤 구조적 분할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보바리와 함께 꿈꾸었으며, 그녀의 욕망을 연민했고, 비극적 삶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보바리의 현재성은 우리의 시대가 여전히도 (채울 수 없는)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며 우리를 떠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존재를 배반하는 욕망이 우리의 삶을 정의할 때, 우리는 모두 보바리이다.

아! 턱도 없는 일! 사실 애써 찾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다 거짓이다! 미소마다 그 뒤에는 권태의 하품이, 환희마다 그 뒤에는 저주가, 쾌락마다 그 뒤에는 혐오가 숨어 있고 황홀한 키스가 끝나면 입술 위에는 오직 보다 큰 관능을 구하는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 남을 뿐이다.



1. 농사 공진회 장면을 읽는 것이 고역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 나는 오히려 교차편집된 영화적 표현을 보는 듯 강한 고조를 느꼈다. 혼란스럽게 동요하는 보바리의 마음을 배경 묘사를 통해 이보다 더 탁월하게 형상화할 수 있을까.

2. 마차 질주 장면은 듣던대로 몹시 섹시했다.

3. 평이한 문장 사이로 불길한 예감이 솟아오르게 하는 후반부의 추락이 전반부의 기나긴 설명보다 매력적이었다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