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97) 썸네일형 리스트형 밤에 하는 생각 요 며칠 강박적으로 책을 읽는다. 거의 소설이지만 에세이랑 시도 좀 읽고 있다. 어쨌든 비문학은 거의 없다. 오늘은 백수린의 데뷔 소설집,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 권여선 신작 에세이를 읽었다. 뭐라도 읽고 있지 않으면 자꾸 자라나는 망상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열심히 눌러담는다. 그러니 오늘도 잠을 못이루는 것은 순전히 그 날의 밤산책 때문이다. 백수린님은 성실한 작가인 것 같다. 신비로운 재능을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소설은 많지 않지만, 게으른 소설도 거의 쓰지 않는다. 노동하는 자의 세속적 성실함으로 꾸준히 좋은 소설을 펴내는 성실한 사람의 느낌. 자기복제와 반복은 단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두 권의 단편집을 읽으면서도 거슬리는 소설이 한 편도 없다는 건 놀라울 정도.. 너에게. 명동성당이 네오고딕인지, 고딕 리바이벌인지는 사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플라잉 버트리스가 있는지, 아니면 흔적만 남았는지도 아무 상관 없지. 중요한 건 그게 말이 되느냐야. 말이 된다는 감각.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런 감각을 기다려 왔다는 생각이 들어. 어둑해진 하늘과, 은은하던 조명과, 선선하던 바람과, 나른했던 목소리와, 가볍게 스치던 피부의 예리한 감각 같은 것들 전부 다 좋았지. 그 날의 네가 자주 생각날 거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말이 된다는 감각, 그 감각에 모든 걸 걸어도 좋겠다는 마음이었어. 이야기를 좋아해. 그럴듯한 이야기에 대한 갈망으로 소설과 영화를 찾아다녔던 것 같아. 서사에 약한 타입. 음악을 들을 때도 가사에, 회화를 볼 때조차 알레고리에 탐닉하는 타입. 그러니까, 나는 이야기가..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태도의 문제 연휴동안 아서 프랭크의 를 읽었다. 사회학자인 프랭크는 39살과 40살에 갑작스럽게 심장마비와 암을 겪으면서, 삶과 질병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얻는다. 이 책은 그가 아픈 몸을 살아내면서 가졌던 생각들을 엮은 에세이집이다. 그런데 기회라니. 질병이 어떻게 삶에 기회일 수 있을까?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이따금 아프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중병을 앓아본 일은 없다. 내 삶이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적도 없다. 며칠간 불편에 시달리기도 하고, 뭔가 몸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한 날도 있었지만, 결코 온전한 몸에 대한 환상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비가역적인 질병을 겪어내고 자신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삶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근본적으로.. 첫 승소의 기분 첫 승소의 기분 지난주에 첫 승소판결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가처분인용결정. 첫 고객회의에서부터 기일 출정, 사건 종결까지 종합적으로 관여한 첫 사건이 되었다. 모든 사건이 이렇게만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날의 기분을 앞으로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는 마음으로, 소소한 기록을 남겨둔다. 지난 월요일이다. 오전에 열심히 참고서면 초안을 회람하고 제출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오후 6시 5분에 옆방 이**님이 갑자기 흥분한 모습으로 복도로 뛰쳐나오셨다. “결정이 나온 것 같은데!” 내 방에 뛰어들어오며 외치셨지만,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아, 그렇습니까?” 일단 놀란 표정을 지어드렸다. 잠시 후 권**님이 송무팀에 메일을 보냈다. “표제 건 즉시 송달받아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별다른 ..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는 나이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는 나이. 작은 힌트 하나에도 들떴다가, 이내 깊이 가라앉는다. 좋은 인연을 찾기란 정말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지만, 물론 거짓말이다. 나는 두 시간만 함께 대화를 나누어도, 깊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어느 정도는 사랑하고 있는 것만 같다. 누구에게서건 매력을 찾을 수 있다. 사랑에는 애초에 매력이 필요 없는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진 것 같은 기분. 기분을 흉내내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어제는 ‘호기심’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오늘은 ‘얼빠’인 것 같다고 말했다. 언젠가는 ‘열정’이라고, 또 언젠가는 ‘경외감’이라고 말했다. 어느 쪽일까? 사실 어느 쪽도 아니다. 이상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쨌거나 종종 안기고 싶은 것이 생긴다. 올드패션드. .. 비위생적인 사랑, <Shape of Water> 2018 비위생적인 사랑, A는 근래에 본 영화 중 가장 좋았다고 했다. B는 자기 인생영화 리스트에 들었다고 했다. C는 2000년대 이후 최고의 영화라고 했다. 나는 캡쳐 한 장면을 프로필에 걸어두었다. 누가 뭐래든, 좋은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이야기는 와 닮아있다. 미녀는 미녀가 아니고, 야수는 야수가 아니라는 점만 빼면. 많은 지점에서 두 이야기는 전혀 다르지만, 상당히 비슷한 이야기로 읽힌다. 악당 스트릭랜드가 의 개스통을 빼다박았기 때문이다. 두 이야기에서 잘생기고 강하며 당당한 백인 청년은 영화가 혐오하는 모든 것을 상징한다. 힘과 권력을 숭상하고, 낯설거나 이질적인 것을 배척하며, 약하고 가련한 것에 대한 연민이 없고, 지식을 나약한 것으로 치부한다. 스트릭랜드는 실은 캡틴아메리카같은 아폴론적 영웅.. <패터슨Paterson> _ 짐 자무쉬Jim Jarmusch 런던을 갈까 말까 며칠을 망설이다가 내일자 항공권을 질렀다. 짐 자무쉬Jim Jarmusch의 신작 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은 시적이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문언 그대로 마치 시와 같다는 말이다. 시는 그저 단어들이다. 단어에는 표정이 없다. 단어의 선택로부터 표정을 짐작해 볼 뿐이다. 영화의 시선도, 남주 아담 드라이버Adam Driver의 연기도, 종이에 적힌 시처럼 담담해서 모호하다. 그리고 그 담담함이 감정의 진폭을 넓힌다. 주인공은 말하자면 방구석 시인이다. 위대한 시인도 몇명을 탄생시킨 조용한 소도시 패터슨에서 그는 혼자서 가끔 시를 쓴다. 비밀노트에 적어내려간 몇 편의 시가 언젠가 세상에 공개된다면, 어쩌면 위대한 시로 칭송받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은 아마도 그저그런 시시한 시겠지만. .. <1987> 봤다 ㅎ선배의 이야기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녹두호프에서 청춘을 허비한 밤이었다. 막차가 끊어지자 ㅎ선배는 인학실(인문대 학생회실)에서 밤을 보내기로 결심하고 학교로 올라왔다. 운동권 소굴이던 인학실에는 밤샘 작업을 위한 낡은 2층침대가 있었으니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문제는 ‘공식적으로는’ 12시 이후에 학교 건물에 출입할 수가 없게 되어 있어서 자동문이 모두 잠긴다는 점이었다. 당시 인학실은 인문대 3동에 있었다. 인문대 건물은 언덕을 따라 8개동으로 지어져 있었는데, 앞동은 문학계열, 뒷동은 사철계열이었다. 중간쯤에 위치한 3동도 언덕을 깎아가며 지었기 때문에 전면은 평지였지만 후면은 2층까지 대지가 솟아있었다. 후면 언덕에서 3동 2층 뒷문으로는 구름다리가 하나 연결되어 있었는데, 바로 이 뒷문 옆이.. 이전 1 2 3 4 5 6 7 ··· 1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