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

(30)
<소공녀>와는 관계 없는 이야기 ‘과자’라는 친구가 있었다. 모두가 과자라고 불렀다. 빅토르 위고의 에 나오는 꼽추의 이름을 따서 ‘콰지모도’라는 아이디를 쓰는 친구였다. 아이디가 너무 길어서 줄여 부른 것인지, 아니면 키읔의 파열음이 주는 거리감을 완화하려던 것인지, 콰지모도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고 그냥 ‘과자’또는 ‘과자씨’라고 불렀다. 어쩌면 콰지모도가 주는 대담하고 이국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상반되었던 그 친구의 수더분한 성격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자는 자주 한가했다. 역시나 한가했던 18살의 나는 꽤 많은 시간을 과자와 보냈다. 그 때 나는 고등학교를 그만 두고 서울에 올라와서 별다른 일정 없이 책이나 읽던 한량이었고, 과자도 탈학교 청소년을 위한 대학로의 어느 대안학교에 비정기적으로 출석하는 것 이외에 할 일이 없었..
Blue and Gold Blue and gold, you make me cold got me jealous like a sixteen years old. 제멋대로 숭배의 마음을 갖는 것은 정말 무해한 일일까. 가슴이 철렁하도록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마음속에 사진처럼 담아두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얼마간의 경외감으로, 또 얼마간의 배덕감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구원 없는 삶 속에서 의지할 만한 것이라곤 이따금씩 느끼는 무해한 망상 뿐이다. 어제는 마리아의 파란 로브에 관하여 장광설을 늘어 놓았다. 파란 드레스를 입고 황금빛 조명 아래에 앉으면, 꽃과 함께 뜬금없는 말을 전하고 싶다. 무척이나 유해한 말이겠으나,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를 일이다. 신화가 되어 사람들을 울릴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은 누군가를 욕하며 술을 ..
지하 산책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소공동 지하를 걷는다. 회사 앞 지하상가로 들어가면 시청역, 을지로입구를 거쳐 동대문까지 갈 수 있는 지하 산책로가 있다. 신 대법관님이 소개해 준 산책길이니, 대법관 루트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보았다. 대법관 루트를 걷다보면 적당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더운 구간과 시원한 구간이 있으며, 길이 넓어지기도 좁아지기도 하고, 시선을 끄는 구경거리도 있다. 계속 걷다보면 심지어 오솔오솔 바람이 부는 듯한 착각도 든다. 어제도 문 닫힌 지하 상점가를 잠시 걸었다. 정처없이 걷다보면 흘러간 대화를 곱씹게 된다. 사이비 교주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광신도의 자질을 타고난 것 아닐까. 무엇에든 뛰어들어 맹신할 준비가 되어있었으나 결국 그럴싸한 교주를 만나지 못한 삶..
밤에 하는 생각 요 며칠 강박적으로 책을 읽는다. 거의 소설이지만 에세이랑 시도 좀 읽고 있다. 어쨌든 비문학은 거의 없다. 오늘은 백수린의 데뷔 소설집,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 권여선 신작 에세이를 읽었다. 뭐라도 읽고 있지 않으면 자꾸 자라나는 망상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열심히 눌러담는다. 그러니 오늘도 잠을 못이루는 것은 순전히 그 날의 밤산책 때문이다. 백수린님은 성실한 작가인 것 같다. 신비로운 재능을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소설은 많지 않지만, 게으른 소설도 거의 쓰지 않는다. 노동하는 자의 세속적 성실함으로 꾸준히 좋은 소설을 펴내는 성실한 사람의 느낌. 자기복제와 반복은 단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두 권의 단편집을 읽으면서도 거슬리는 소설이 한 편도 없다는 건 놀라울 정도..
너에게. 명동성당이 네오고딕인지, 고딕 리바이벌인지는 사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플라잉 버트리스가 있는지, 아니면 흔적만 남았는지도 아무 상관 없지. 중요한 건 그게 말이 되느냐야. 말이 된다는 감각.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런 감각을 기다려 왔다는 생각이 들어. 어둑해진 하늘과, 은은하던 조명과, 선선하던 바람과, 나른했던 목소리와, 가볍게 스치던 피부의 예리한 감각 같은 것들 전부 다 좋았지. 그 날의 네가 자주 생각날 거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말이 된다는 감각, 그 감각에 모든 걸 걸어도 좋겠다는 마음이었어. 이야기를 좋아해. 그럴듯한 이야기에 대한 갈망으로 소설과 영화를 찾아다녔던 것 같아. 서사에 약한 타입. 음악을 들을 때도 가사에, 회화를 볼 때조차 알레고리에 탐닉하는 타입. 그러니까, 나는 이야기가..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태도의 문제 연휴동안 아서 프랭크의 를 읽었다. 사회학자인 프랭크는 39살과 40살에 갑작스럽게 심장마비와 암을 겪으면서, 삶과 질병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얻는다. 이 책은 그가 아픈 몸을 살아내면서 가졌던 생각들을 엮은 에세이집이다. 그런데 기회라니. 질병이 어떻게 삶에 기회일 수 있을까?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이따금 아프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중병을 앓아본 일은 없다. 내 삶이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적도 없다. 며칠간 불편에 시달리기도 하고, 뭔가 몸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한 날도 있었지만, 결코 온전한 몸에 대한 환상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비가역적인 질병을 겪어내고 자신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삶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근본적으로..
첫 승소의 기분 첫 승소의 기분 지난주에 첫 승소판결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가처분인용결정. 첫 고객회의에서부터 기일 출정, 사건 종결까지 종합적으로 관여한 첫 사건이 되었다. 모든 사건이 이렇게만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날의 기분을 앞으로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는 마음으로, 소소한 기록을 남겨둔다. 지난 월요일이다. 오전에 열심히 참고서면 초안을 회람하고 제출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오후 6시 5분에 옆방 이**님이 갑자기 흥분한 모습으로 복도로 뛰쳐나오셨다. “결정이 나온 것 같은데!” 내 방에 뛰어들어오며 외치셨지만,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아, 그렇습니까?” 일단 놀란 표정을 지어드렸다. 잠시 후 권**님이 송무팀에 메일을 보냈다. “표제 건 즉시 송달받아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별다른 ..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는 나이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는 나이. 작은 힌트 하나에도 들떴다가, 이내 깊이 가라앉는다. 좋은 인연을 찾기란 정말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지만, 물론 거짓말이다. 나는 두 시간만 함께 대화를 나누어도, 깊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어느 정도는 사랑하고 있는 것만 같다. 누구에게서건 매력을 찾을 수 있다. 사랑에는 애초에 매력이 필요 없는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진 것 같은 기분. 기분을 흉내내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어제는 ‘호기심’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오늘은 ‘얼빠’인 것 같다고 말했다. 언젠가는 ‘열정’이라고, 또 언젠가는 ‘경외감’이라고 말했다. 어느 쪽일까? 사실 어느 쪽도 아니다. 이상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쨌거나 종종 안기고 싶은 것이 생긴다. 올드패션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