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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범_이영광 인질범 / 이영광 십 년을 쓰던 의자를 내다 버리는 아침 세상도 버려 온 내가 가구 따위를 못 버릴 리 없으니까, 의자를 들고 나가 놓아준다 의자도 버리는 내가, 십 년을 의자에 앉아 생각만 했던 사람을 버리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사람도 안고 나가 놓아준다 이것은 너른 바깥에 창살 없는 새 감옥을 마련해 주는 일 이제 그만 투항하여 광명 찾자는 일 늙은 의자는 초록 언덕 아래로 실려 가고 고운 얼굴, 풍악(風樂)처럼 공중을 날아간다 잘 가라, 탈출이라곤 모르던 인질아 인사하면 잘 있어라, 포기라곤 모르던 인질범 답례하며 사정을 말하자면, 내게는 겨우 새 의자가 하나 생겼을 뿐이다 사정을 숨기자면, 다시, 투항이라곤 모르는 인질범이 되었을 뿐이다 오랜만에 좋은 시인을 발견해서 며칠을 우려먹었다. 시를 읽던..
맨날 듣는 노래 사실, 얼마 전 술을 마시던 날에는 뜬금없이 많이도 울었다. 눈물이 줄줄이도 흘러서 친구 앞에서 몹시 민망했다. 오랜만에 들은 친구의 타박이 서러웠던 것은 아니다. 화가 나거나 억울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네가 난폭한 표정을 짓던 날에도 나는 하나도 울지 않았는데. 막무가내로 믿어보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다 늙은 응석받이를 좋아하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 경험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잘 알고 있다. 너도 내가 응석받이라서 버렸나?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왜 나를 측은해하지 않느냐고 잘도 빈약한 속내를 늘어놓았다. 자빠지고 엎어지고 무르팍이 깨졌지만 애걸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나의 삶에선 언제나 진실이 패배한다. 알고 보면 나는 착합니다. 그런 얼빠진 표정을 짓다가 연행되어 가는 것이 나의 일상이다. ..
너의 선물 다 뜯어놓았네 다 망쳐놓았네 이렇게 #1 맛있는 음식 맛이없어요 어여쁜 옷도 안 예뻐요 놀러 가는 것도 싫어싫어요 그냥 나 가만히 너의 선물을 #2 니가 준 선물을 아작아작내고 니가 준 쓰레기는 곱게 포장해 다음 사람에게 던져 버릴텐데
Love, your magic spell is everywhere 이 노래는 클럽 에반스에서 처음 들었다. 그 때는 색소폰이 있는 쿼텟이고 보컬은 없었는데, 가사도 모르는 멜로디가 다음날까지 귀에 울려댔다.. Andrea Motis의 트럼펫은 조금 버거워 보이는데, Astrud Gilberto를 생각나게 하는 표정이다.
Youn Sun Nah - Momento Magico 꼬뜨다쥐르의 생폴드방스에서는 7월마다 재즈/클래식 패스티벌이 열린다. 중세마을을 뒤로 하고 산능성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작은 공연장이 설치된다. 매일 공연이 저녁 9시에 시작되는데, 물이나 와인 한잔씩 들고 앉아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으면 무대 뒤로 붉은 노을이 뉘엿뉘엿 넘어간다. 제일 좋았던 건 . 음원보다 라이브가 훨씬 좋다. 나윤선의 휘적휘적하는 손짓과 약간의 쇼맨쉽이 가미되어 듣는 맛이 배가된다. 참고로, 이번 신앨범에 수록된 도 좋다. 화자가 여자라서 색다른 느낌.
Roy Hargrove Quintet - Strasbourg St. Denis 빠리의 스트라스부르-생드니 역은 대충 망원역 정도일 거라고 한다.
명절의 끝 이제껏 도약을 꿈꿔본 적 없다 다만 사각형의 문들이 나를 공허에서 공허로 평면에서 평면으로 옮겼다 – , 심보선 신기한 마음이 들 때에는 글을 읽는다. 때로는 타인의 글이 나보다 더 내 마음을 잘 아는 것 같다. 명절 연휴는 평범하지 않은 듯 평범하였으나, 오가는 길에 글이 풍성해서 좋았다. 사람은 서른을 넘으면서 취향이 고정되어 버린다고 했다. 그 전까지는 항상 새로운 노래, 새로운 작가, 새로운 영화에 목말라 하지만, 서른을 넘기면 전에 듣던 노래, 책, 영화를 다시 찾는 게 편해진단다. 낯설고 새로운 것은 피곤해지고, 익숙한 옛 것은 반갑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만히 살다가는 순식간에 뒤떨어진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니, 의식적인 노력으로 새로운 것들을 찾으며 살아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다. 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Rue des boutiques obscures>, 파트릭 모디아노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 9p 어느 날엔가 인생의 네 단계에 관한 영상을 본 일이 있었다. 유튜브의 그저 그런 “inspiring videos” 채널 중의 하나였는데, 충실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음의 네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1) 주위를 보고 따라하는 유아기, 2)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를 시험하는 청년기, 3) 한계에 맞추어 목표를 선택하고 열중하는 중년기, 4) 인생의 유산을 남기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노년기. 그리고 위 각 단계를 잘 거치기 위해서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삶의 진실이 있다. 언제나 꿈과 희망을 좇으라고 부추기는 세간의 말과는 반대로, ‘인생은 유한하며 나의 능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