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101)
산보다 바다 마음이 산란할 땐 불을 꺼둔다. 환한 빛은 부끄럽다. 방에 있는 모든 불을 다 껐지만, 밤새 창으로는 가로등 빛이 들이쳤다. 주홍빛 그림자가 옹색하고 어두운 방에 있는 가구들의 배치를 드러내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냉장고의 검은 실루엣이 보인다. 문득 손을 뻗어도 냉장고가 닿지 않는다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진다. 작은 몸 하나로 이렇게 넓은 공간을 꿰차고 살아가는 인간이 혐오스럽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스트레칭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며 불평했던 그 원룸이다.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열대야도 아닌데 밤새 뒤척이기만 했다.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후회하는 일들이 늘어만 갔다. 좋아하던 것들은 전부 사라져만 가는데, 새로운 것을 좋아하기에는 내 머뭇거림이 너무 컸다. 나를 훈육하고 자라게 만..
It was one of those madeleine moments. Mais, quand d’un passé ancien rien ne subsiste, après la mort des êtres, après la destruction des choses, seules, plus frêles mais plus vivaces, plus immatérielles, plus persistantes, plus fidèles, l’odeur et la saveur restent encore longtemps, comme des âmes, à se rappeler, à attendre, à espérer, sur la ruine de tout le reste, à porter sans fléchir, sur leur gouttelette presque impalpable, l’éd..
<세상의 모든 계절> 봄이다. 봄이 왔다. 용산에 벚꽃이 만발이다. 마시는 공기 속에 얼마간의 꽃내음이 섞인 듯한 기분이다. 요즘엔 계절의 변화를 예민하게 의식하게 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또 한 번의 ‘모든 계절’이 지나갔을 뿐이지만, 그 감상은 내 유년시절과는 전혀 다르다. 어린 나에게 계절이란 이를테면 감정의 뒷 배경 같은 것이었다. 나는 변화하는 계절 앞에서 기쁘거나, 외롭거나, 때때로 설레었지만, 그 것은 계절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나는 성가시고 귀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에는 모든 것이 계절이다. 공기도, 소리도, 풍경도, 사람도, 모든 것이 사계를 따라 떠나가고 돌아온다. 계절을 예민하게 의식하는 것.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철이 든다고 표현한다. 나는 예민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딜레탕트 공기가 건조하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른다. 물을 자주 들이키려 해보지만 어느 순간엔가 목마름에 익숙해져 있다. 매 순간 평가받고 있는 기분이 든다. 자존감이 최저인지 스페이스 공감에서 이 나온다. 재즈바에 가고 싶어졌다. 누구랑 갔더라. 처음 갔던 에반스클럽의 작은 무대가 좋았다. 작은 테이블도 좋았고, 작은 술잔도 좋았다. 재즈의 계획된 우발성은 매혹적이었다. 나는 재즈가 좋았다. 재즈가 좋았고, 재즈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기분도 좋았고,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좋았다. 재즈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실은 그 날 이후 재즈와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돌이켜 보건데 내 모든 은밀한 애착은 항상 그랬다. 나는 그저 젠체하는 딜레탕트 정도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어째서 어떤 것에는..
마담 보바리 그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정말 하잘것없고 공허한 경험이라는 사실은 우리 인생을 이어주는 사슬에는 항상 어느 한 고리가 빠져 있고 객관적 무의미와 순전히 주관적인 의미가 안겨주는 서글픔이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아르놀트 하우저 "보바리는 바로 나다."라고 플로베르가 말했을 때, 그는 자기 경멸과 더불어 보바리에 대한 얼마간의 애착을 담으려 했을 것이다. 조야한 일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어딘가 낭만적 전망을 꿈꾸며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숙명이라면, 누군들 한번쯤 보바리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현실로부터 도피해 다른 어떤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는 것이 보바리즘이라면, 소설이라는 형식이야말로 이미 보바리즘적 욕망을 체현하고 있는 구성물이다. 교양소설이 주관..
20100915 전화_ 그 사람이 내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 맞췄다. (몇 달 만인데도) 전화를 받자마자 뭐해요, 라고 물었더니 문원이구나, 하고 대답해 주었다. 서운했던 감정도, 침울해 있던 저녁도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안 그래도 5분 전에 생각났었다는 입 발린 말에도 잘도 넘어가 버렸다. 요즘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내가 걱정해주지 않아도 얼마든지 여기저기 잘 걸어 다닐 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소식을 들을 수 없을 때면 종종 떠오르곤 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피곤한 인상이 신경 쓰였는데, 요즘엔 전처럼 좀 장난끼 있게 웃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사악하던 송곳니. 누나와 추석에 할머니네 갈 약속을 잡았다. 밤늦은 전화였는데도 설계중이라 바쁘다고 했다. 요즘에도 야근을 많이 하는 걸까. 바뀐 번호를 가족에게 알려주는 것도..
<분홍 리본의 시절> _ 권여선 _ 권여선 "새로 이사간 신도시에서의 가을은 그렇게 안온하고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지나갔다. 그해 가을을 회고하면서 내가 품는 의문은 이것이다. 수림도 선배가 저지른 그 많은 실수 중 하나였던가? 그리고 나도? 선배의 아내는 이 모든 사태를 훤히 알고 있었던가? 선배는 아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가?" "순간 툭 하고 뭔가 나를 치고 지나갔다. 아니 내가 그것을 툭 쳤는지도 모른다. 곪은 부위처럼 민감한 그것, 오래 전에 단념했다고 믿었던 그것, 그러나 어느 틈에 농익어 진물을 흘리는 그것, 입안에 다소 끈끈하고 신 침을 고이게 하고 미간을 오그라들게 하는 그것, 툭 건드려진 뒤부터 움찔 움찔 움직이며 몸을 비트는 그것. 나는 책장의 흰 가로장에 이마를 대고 울었다. 울면서, 내가 내 뒤통수를 내려찍..
2010908 위선과 나약함. 위선, 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 오히려 나약함, 이라고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나도 알아.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가 얼마나 희극적으로 비칠지. 하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건 그냥 내가 못난 인간인 탓이니까. 사람 사는 것 다 비슷해. 나라고 해서 다를 리 없잖아. 욕망이 있고 두려움이 있는 나약한 인간이야.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고 그러는 거야. 심지어 때로는 잘못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마음에 눈 딱 감고 저지르기도 해. 그리고는 후회도 하고, 반성도 하고, 그래놓고선 다 잊고 또 저지르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사람인지, 내 한계는 어느 정도인지 의식하면서 살아가. 실은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오히려 그래서, 내가 얄팍한 인간이라서, 더욱 뭔가 숭고하고 이상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