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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통의 죽음> 가보 톰파는 의식적으로 (거의 강박적으로) 을 현재로 소환한다. 극에는 18세기 프랑스를 연상시킬만한 외적 요소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로베스 피에르가 차려입은 네이비 스트라이프 수트는 방금 프라다나 톰포드에서 뽑아온 것처럼 극도로 모던하며, 기하학적 구성과 입체성을 강조한 미니멀한 무대장치는 전위적 구성주의를 연상시킨다. 악명 높은 공안위원회는 바로크 공회당 대신 신식 컨퍼런스룸에서 열리는 식이다. 현대화와 동시에 극의 무대를 현지화하려는 노력도 보이는데, 라 마르세예즈가 나 과 중첩되곤 하는 것이다. 이는 작품을 현실에 대한 은유로 이해하도록 강제한다. 연출가는 이야기를 18세기 프랑스에서 벌어진 예외적 상황으로 박제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로베스피에르의 기자회견은 다소 과하다고..
<블루 드레스>, <탐욕의 제국> “6개월 혹은 1~2년 후에 그때의 고문 가해자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행한 고문행위에 대해 전부 부정했다. 판사들은 고문 피해자들을 증인으로 법정에 불러세웠지만 그들의 혈류라든지 부러진 뼈, 데인 피부는 보려 하지 않고 오직 그들이 긴장해서 말을 더듬고 떠는 모습에만 주목했다. 그리고 보안경찰들이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들이 판사와 그 가족들을 테러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반론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주장을 수용했다. 그토록 엄혹한 시절에도 판사들 가운데는 법관으로서의 독립성을 지키고 사법적 양심을 보여준 명예로운 판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알비 삭스, p. 40면접순서를 기다리면서 를 읽었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맞..
내 마음의 모든 가을이 너를 그리워해 나는 아는 척을 참 좋아한다. 음악이나 영화, 문학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 꺼내기를 즐겨한다. 새로 만난 사람들에게는 지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오래 본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적은 양의 지식으로 이야기를 부풀려 하는지 이미 간파하고 있다. 사실 문화나 예술에 대한 내 지식은 매우 협소한 편인데, 그래서 아는 척을 위한 내 전략은 대부분 훈고학적이다. 평론을 위한 이론이나 참신한 관점이 없기 때문에, 그저 오랫동안 향유한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지식으로 뉴비들에게 어필하는 식이다. 화제가 되고 있는 작가나 영화감독에 대해 “근데 그 사람은 초기작들이 더 좋아”라는 식으로 말하는 거다. 아무래도 잘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 이 사람은 그 작품들을 초기부터 꿰고 있구..
평범한 일상을 위해 나는 비범한 명사들의 평범한 일상이 궁금하다. 역사에 남을 업적들을 남기는 동안 친구들은 언제 만났을까. 보고팠던 소설 한 권은 어디서 읽었을까. 건강 유지를 위해 짬짬이 운동을 했을까. 누구도 그런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밴저민 프랭클린은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려 바쁘게 살아가면서도 매일 아침 한두 시간씩 짬을 내 벌거벗은 채 독서를 했다. 카프카는 낮 동안 보험사 직원으로 일하고는 밤 11시 30분 이후에야 글을 썼다. 프루스트는 우유를 듬뿍 넣은 커피를 반드시 하루 두 번 마시며 사색했다고 하며, 피카소는 일주일에 한번 손님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함께 했다. 이들이 습관처럼 지킨 daily rituals은 삶에 끌려 다니지 않기 위해 일상에 내린 닻이었다. 오늘부터 내 daily rituals..
기형도 _ 대학 시절 대학 시절 ■ 기형도(奇亨度, 1960~1989) 나무 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목련 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먼 훗날, 만약 내가 소설을 쓴다면 기형도의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80년대 초반의 대학, 격동의 시기에도 기형도의 화자는 플라톤을 읽었다. 아마도 플라톤은 80년대의 대학생인 화자에게 아..
<호밀밭의 파수꾼>_ 신해욱 호밀밭의 파수꾼 // 신해욱 교과서를 읽으며나는 감동에 젖는다. 아픈 아이들이 아프지 않도록혼자 죽은 나무들이 외롭지 않도록 정성껏 밑줄을 긋고한쪽 눈으로 눈물을 흘린다. 칠판에는 하얀 글자들이 가득하고조금씩 움직인다. 나는 같은 자세로 앉아자꾸만 같은 줄을 읽으며 나를 지나그냥 가버리고 마는 이들을지키고 있다. 죠스처럼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싶어진다.=== 신해욱 시인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아마도 그가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의 목소리로 그의 시와 글을 읽었다. 우리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고서야 그가 동글동글한 눈을 가진 여자임을 알았다. 나는 그의 시를 좋아하기로 결심했다. 눈 덮인 풍경을 뒤로 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렌즈를 바라보던 그 사진이 좋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스밀라에 대한 그의 글을 ..
내 꿈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었다 스카프 매듭이 예쁘게 묶인 날에는 일과가 끝나도 스카프를 풀고 싶지 않다. 머릿속이 잔뜩 헝클어진 채로 침대에 몸을 던져도 목에는 정돈된 스카프가 걸려있다는 사실이 꽤나 위안이 된다. 후회뿐인 어제와 진부한 오늘이 계속돼도, 목에 닿는 실크 스카프의 아슬아슬한 감각은 그럴싸한 내일을 상상하게 한다. 내 꿈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었다. 그 사람에겐 한낱 농담일 뿐인 내 꿈을. 몇 년 전인지 이제는 손가락으로 꼽아봐야 알 어느 밤. 공원 벤치에 캔커피도 한 잔 없이 앉아서 우린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던가. 우리가 10년 뒤에 하고 있을 일들을 하나둘 꼽으면서 무슨 시덥지 않은 웃음을 나눴던 것일까. 그 사람은 내가 믿을 만 하다고 느꼈고, 나는 그 사람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나는 10년 뒤에 내가 할 멋진..
T의 이름 오늘도 T의 이름을 들었다. 나도 내가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 T가 나에게서 무엇을 보려 했었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는 오해와 의도된 말실수 사이에서 나도 T도 길을 잃었다. 그저 그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의 생각을 조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심한 기시감을 느꼈다. 만약 죄책감이 죄악감과 책임감을 더한 것이 맞다면 죄책감이라고 표현해도 되겠다. 조급한 마음이 들 때면 의도적으로 게으름을 부린다. 마음속으론 1분이 급해도 괜히 느긋한 걸음을 떼거나 커피를 시키거나 하는 식이다. 애초부터 길게 본다는 마음이었다. 어차피 며칠 새에 그 사람이 사랑에 빠지거나 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나는 초조하게 커피를 주문했다. 숲을 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