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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모든 가을이 너를 그리워해 나는 아는 척을 참 좋아한다. 음악이나 영화, 문학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 꺼내기를 즐겨한다. 새로 만난 사람들에게는 지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오래 본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적은 양의 지식으로 이야기를 부풀려 하는지 이미 간파하고 있다. 사실 문화나 예술에 대한 내 지식은 매우 협소한 편인데, 그래서 아는 척을 위한 내 전략은 대부분 훈고학적이다. 평론을 위한 이론이나 참신한 관점이 없기 때문에, 그저 오랫동안 향유한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지식으로 뉴비들에게 어필하는 식이다. 화제가 되고 있는 작가나 영화감독에 대해 “근데 그 사람은 초기작들이 더 좋아”라는 식으로 말하는 거다. 아무래도 잘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 이 사람은 그 작품들을 초기부터 꿰고 있구..
평범한 일상을 위해 나는 비범한 명사들의 평범한 일상이 궁금하다. 역사에 남을 업적들을 남기는 동안 친구들은 언제 만났을까. 보고팠던 소설 한 권은 어디서 읽었을까. 건강 유지를 위해 짬짬이 운동을 했을까. 누구도 그런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밴저민 프랭클린은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려 바쁘게 살아가면서도 매일 아침 한두 시간씩 짬을 내 벌거벗은 채 독서를 했다. 카프카는 낮 동안 보험사 직원으로 일하고는 밤 11시 30분 이후에야 글을 썼다. 프루스트는 우유를 듬뿍 넣은 커피를 반드시 하루 두 번 마시며 사색했다고 하며, 피카소는 일주일에 한번 손님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함께 했다. 이들이 습관처럼 지킨 daily rituals은 삶에 끌려 다니지 않기 위해 일상에 내린 닻이었다. 오늘부터 내 daily rituals..
기형도 _ 대학 시절 대학 시절 ■ 기형도(奇亨度, 1960~1989) 나무 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목련 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먼 훗날, 만약 내가 소설을 쓴다면 기형도의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80년대 초반의 대학, 격동의 시기에도 기형도의 화자는 플라톤을 읽었다. 아마도 플라톤은 80년대의 대학생인 화자에게 아..
<호밀밭의 파수꾼>_ 신해욱 호밀밭의 파수꾼 // 신해욱 교과서를 읽으며나는 감동에 젖는다. 아픈 아이들이 아프지 않도록혼자 죽은 나무들이 외롭지 않도록 정성껏 밑줄을 긋고한쪽 눈으로 눈물을 흘린다. 칠판에는 하얀 글자들이 가득하고조금씩 움직인다. 나는 같은 자세로 앉아자꾸만 같은 줄을 읽으며 나를 지나그냥 가버리고 마는 이들을지키고 있다. 죠스처럼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싶어진다.=== 신해욱 시인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아마도 그가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의 목소리로 그의 시와 글을 읽었다. 우리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고서야 그가 동글동글한 눈을 가진 여자임을 알았다. 나는 그의 시를 좋아하기로 결심했다. 눈 덮인 풍경을 뒤로 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렌즈를 바라보던 그 사진이 좋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스밀라에 대한 그의 글을 ..
내 꿈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었다 스카프 매듭이 예쁘게 묶인 날에는 일과가 끝나도 스카프를 풀고 싶지 않다. 머릿속이 잔뜩 헝클어진 채로 침대에 몸을 던져도 목에는 정돈된 스카프가 걸려있다는 사실이 꽤나 위안이 된다. 후회뿐인 어제와 진부한 오늘이 계속돼도, 목에 닿는 실크 스카프의 아슬아슬한 감각은 그럴싸한 내일을 상상하게 한다. 내 꿈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었다. 그 사람에겐 한낱 농담일 뿐인 내 꿈을. 몇 년 전인지 이제는 손가락으로 꼽아봐야 알 어느 밤. 공원 벤치에 캔커피도 한 잔 없이 앉아서 우린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던가. 우리가 10년 뒤에 하고 있을 일들을 하나둘 꼽으면서 무슨 시덥지 않은 웃음을 나눴던 것일까. 그 사람은 내가 믿을 만 하다고 느꼈고, 나는 그 사람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나는 10년 뒤에 내가 할 멋진..
T의 이름 오늘도 T의 이름을 들었다. 나도 내가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 T가 나에게서 무엇을 보려 했었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는 오해와 의도된 말실수 사이에서 나도 T도 길을 잃었다. 그저 그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의 생각을 조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심한 기시감을 느꼈다. 만약 죄책감이 죄악감과 책임감을 더한 것이 맞다면 죄책감이라고 표현해도 되겠다. 조급한 마음이 들 때면 의도적으로 게으름을 부린다. 마음속으론 1분이 급해도 괜히 느긋한 걸음을 떼거나 커피를 시키거나 하는 식이다. 애초부터 길게 본다는 마음이었다. 어차피 며칠 새에 그 사람이 사랑에 빠지거나 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나는 초조하게 커피를 주문했다. 숲을 흔..
블루문의 우울 남을 보여주기 위해 쓰지는 않지만, 누군가 읽을 경우를 감안해서 쓴다. 내 친구는 언젠가 ‘일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자신의 일기에조차 솔직할 수 없는 우리 처지에는 쓴웃음이 났지만, 그 후로도 이보다 나은 정의는 들어본 바 없다. 언제나 누군가에게 들킬 상황을 의식하며 쓴다. 과시적인 태도로 감정을 과장하고 생각을 부풀린다. 무수한 자기 검열과 혼자만 아는 상징으로 범벅이 된 옛 일기를 읽고 있자면 스스로에게 솔직하기란 몹시도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지만, 온전한 진실을 전달하지도 않는다. 변명답지 않게 변명하기 위해 세심하게 말을 고르는 나를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좀 다를 줄 알았다고, 보다 솔직해지면 어떠냐고 했다. 나를 마음껏 할퀴고 상처를 주고 싶었다고, ..
내 사랑은 / 허연 내 사랑은 / 허연 내가 앉은 2층 창으로 지하철 공사 5-24공구 건설현장이 보였고 전화는 오지 않았다. 몰인격한 내가 몰인격한 당신을 기다린다는 것. 당신을 테두리 안에 집어넣으려 한다는 것.창문이 흔들릴때마다 나는 내 인생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불행의 냄새가 나는 것들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붙들고 있는 것들.합성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 ==사실 내 방의 창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창이 적당하게 크고 오후 느지막이는 햇살이 들이치며 열어두면 선선한 산바람이 들어오는 게 마음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