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99) 썸네일형 리스트형 <패터슨Paterson> _ 짐 자무쉬Jim Jarmusch 런던을 갈까 말까 며칠을 망설이다가 내일자 항공권을 질렀다. 짐 자무쉬Jim Jarmusch의 신작 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은 시적이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문언 그대로 마치 시와 같다는 말이다. 시는 그저 단어들이다. 단어에는 표정이 없다. 단어의 선택로부터 표정을 짐작해 볼 뿐이다. 영화의 시선도, 남주 아담 드라이버Adam Driver의 연기도, 종이에 적힌 시처럼 담담해서 모호하다. 그리고 그 담담함이 감정의 진폭을 넓힌다. 주인공은 말하자면 방구석 시인이다. 위대한 시인도 몇명을 탄생시킨 조용한 소도시 패터슨에서 그는 혼자서 가끔 시를 쓴다. 비밀노트에 적어내려간 몇 편의 시가 언젠가 세상에 공개된다면, 어쩌면 위대한 시로 칭송받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은 아마도 그저그런 시시한 시겠지만. .. <1987> 봤다 ㅎ선배의 이야기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녹두호프에서 청춘을 허비한 밤이었다. 막차가 끊어지자 ㅎ선배는 인학실(인문대 학생회실)에서 밤을 보내기로 결심하고 학교로 올라왔다. 운동권 소굴이던 인학실에는 밤샘 작업을 위한 낡은 2층침대가 있었으니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문제는 ‘공식적으로는’ 12시 이후에 학교 건물에 출입할 수가 없게 되어 있어서 자동문이 모두 잠긴다는 점이었다. 당시 인학실은 인문대 3동에 있었다. 인문대 건물은 언덕을 따라 8개동으로 지어져 있었는데, 앞동은 문학계열, 뒷동은 사철계열이었다. 중간쯤에 위치한 3동도 언덕을 깎아가며 지었기 때문에 전면은 평지였지만 후면은 2층까지 대지가 솟아있었다. 후면 언덕에서 3동 2층 뒷문으로는 구름다리가 하나 연결되어 있었는데, 바로 이 뒷문 옆이.. 12월 1일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유리문을 밀고 나가면서 잠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로 로스쿨에서의 마지막 학기시험이 끝났다. “무사히 수료는 하겠네” 농담처럼 말했지만, 어쨌든 나도 무사히 수료는 하게 되었다. 지난 3년을 돌이켜보면 대체로 즐거웠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다. 지치거나 외로운 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더 많은 날들은 잔잔하게 지나갔다. 그런 잔잔한 일상이 모여서 행복을 이루는 거라고 믿고 싶다. 이제 학교를 떠나도 매일매일을 잔잔하게 잘 살아내야지. 그래서 요즘에는 졸업 이후의 삶에 대해서 종종 생각해 본다. 숭고함을 간직하고 살아가기는 어려운 세상이다. ‘일단 학자금부터 갚고’라고 습관처럼 말했다. 대단치도 않은 빚이지만, 로펌행의 핑계로는 제격이다. 핑계마저 다 떨어지면 무슨 말로.. 어제 돈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을 멀리할 필요는 없지. 그건 그냥 솔직한 거니까. 사람이 너무 돈돈 해대면 피곤할 수는 있지. 그래도 돈은 결국 가치잖아. 가치를 원한다는 말에는 아무런 악의가 없지. 오히려 조심해야 하는 사람은 돈을 안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닐까. 아마도 돈에 미친 사람일 테니까. 그래도 말이야, 그냥 침묵하는 편이 나은 말들이 있지.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은 사정이 있지. 잘생기고 예쁜 얼굴 싫어하는 사람 아무도 없지만, 하루종일 거울만 보고 있다면 그건 건강하지 않은 거잖아. 어쨌든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지. 그냥 모르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 궁금하지도 않았던 일들인데 이제 너무 잘 알게 되는 것 같아서 피곤해. 글쎄.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제 그냥 사는 것 같아서 .. 에드워드 호퍼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적어도 기억나는 범위 내에서는 말이다. 그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내가 흥미를 가진 부분은, 그의 부인 조세핀 호퍼도 유망한 미술가였고, 에드워드의 작가적 성공을 위하여 미술을 포기했으며, 그는 부인을 모델로 여러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의 그림은 정적인 태도로 현대인의 짙은 멜랑꼴리를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 중에는 방 안에 혼자 있는 조세핀의 뒷모습을 그린 것도 여럿 있었다. 그의 그림 다수는 아마도 뉴욕에 있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미국 미술관에는 거의 가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뉴욕에 갔던 건 4년 전이다. 화창한 여름 날씨가 좋아서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냈다. 겨울의 뉴욕은 날씨가 최악이라는데, 미술관은 다닐만 하려나. 조세핀의 .. 산책, 산 책. 먼저 산책. 때때로 이유 없이 시청 주변을 걷는다. 서울의 밤은 어딘가 음흉한 느낌이 있다. 오늘은 명동에서 저녁으로 회냉면을 먹었다. 여름에는 함흥냉면이, 겨울에는 평양냉면이 땡긴다. 광화문으로 올라오는 길에 하얀 칫솔도 하나 샀다. 구경할 것이 많았지만, 아무 것도 사지 않았다. 사실은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이다. 어느 일본인 노부부를 보면서, 서대문 쪽에서 에어비앤비를 하고 싶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에는 서촌을 걸었다. 수성동 계곡에 올라 정자에 누워 한참을 보냈다. 날이 무척 더웠고,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인왕산에서 바람이 솔솔 불어올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동행의 웃음소리가 나른했다. 이런 삶이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 때는 괜찮았다. 금요일에는 회나무길도 걸었다. .. 예상표절 “그에게는 언제나 대인관계가 순탄했으니, 작은 균열도 생소하여 피로감이 컸다.” 지나고 나면 굳이 마음쓸만큼 대단치도 않다. 그렇게 믿고 지냈다. 그런데 비가 많이 왔다. 비가 참 많이 왔고, 비가 많이 또 계속 왔고, 지겹도록 계속 비가 왔다. 비도 참 많이도 오네. 떨어지는 비를 넋놓고 본 날도 있었다. 비가 이렇게 많이 와도 되나. 언제까지 비가 오려나. 이제 비가 그만 그칠 때도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할 즈음에 그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그 후로도 며칠을 비가 그치지 않았다. 칠월이었다. 칠월 들어서 책을 세 권 읽었다. 김애란의 은 아주 좋은 작품과 그저 그런 작품이 섞여있다. 이나 는 김애란다운 분위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결혼 이후의 삶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같은 작품은 더이상 나오지.. <옥자> by 봉준호 옥자 사랑은 보편적이지만, 사랑의 조건은 제각각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랑 이야기는 보편적인 서사를 개별적인 사랑의 조건이 드러나도록 잘 세공해야 한다. 우리는 삶에 관한 진실을 깨닫기 위해 허구의 이야기를 본다. 진실로 믿을만큼 훌륭한 거짓말은 사소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신은 디테일에 있다. 내가 미국인이었더라도 을 최고의 영화로 꼽았을까? 아닐 것이다. 잘 만든 스릴러이긴 하지만, 인생의 영화라고 할 것은 아니다. 에서 내가 조용구(폭력경찰)라는 인물을 가장 좋아하게 된 것을 나의 한국적 배경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조용구라는 인물의 입체성이 좋다. 가끔은 그의 인생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서글퍼진다.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닌 인물에 이렇게 빠져버린 건, 그만큼 디테일이 훌륭한.. 이전 1 2 3 4 5 6 7 8 ··· 1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