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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온 모리스 Morris from America (2016) 채드 하티건 / Morris from America by Chad Hartigan전주국제영화제JIFF 야외상영작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 온 모리스는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주변인이다. 그리고 자기가 주변인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모리스에게 힙합이 EDM보다 쿨하고, 풋볼이 사커보다 재밌으며, 망할 독일어도 배우고 싶지 않다. 외국인으로서의 어려움과 사춘기적 혼란이 겹쳐 모리스는 외로운 상태다. 그러나 힙합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며 친구를 만들어간다는 뻔한 이야기로 달려가지 않는다. 힙합은 그저 지나가는 작은 에피소드일 뿐, 모리스에게 허들을 넘는 그 결정적 순간은 없다. 연적이 만들어 준 무대에서의 적당히 덜 허접한 프리스타일도 그저 소소한 경험일 뿐이다. 모리스의 아버지도, ..
바덴 바덴 Baden Baden (2016) by 라셸 랑 Rachel Lang, 전주국제영화제JIFF 안나는 보잘 것 없는 청춘이다. 부푼 꿈을 안고 고향 스트라스부르를 떠나 독일에 왔건만 하찮은 일 밖에 맡지 못하고 욕이나 먹고 있다. 하루를 망쳐버리고 나니 수중에는 렌트업체에 반납해야 할 슈퍼카 한대와 파티용 드레스. 안나는 그대로 할머니 댁을 향한다. 할머니만은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품어주리라 생각한 것일까. 편찮은 할머니가 목욕 중에 다쳤다는 소식을 듣자 안나는 욕실을 뜯어고치기로 결심한다. 안나는 21세기를 표류하는 프랑스 여성이다. 짧은 숏컷에 톰보이 스타일을 고집하며 바보 같은 성적 편견에 휘둘리지 않는다. 여성에게 사회는 평등해졌고 성적으로 개방되었으며 누구나 (심지어 국경을 넘어서) 자기가 원하는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보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마주앉아 다른 풍경을 본다. 두 눈이 한 방향을 향하므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보는 수밖에 없다. 그대의 얼굴 너머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나. 시선이 머무는 방향을 불안한 마음으로 짐작해 본다. 그대의 침묵이 길었다. 대답은 유예하는 쪽이 간편했다. 노래가 달콤해도 몸에서 고기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나의 손은 형편없었지만, 그대는 그림을 탓하지 않았다. 내일은 더 잘하겠지.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든 노트를 덮는다. 봐서. 보고. 그런 유예의 말들은 외로우면서도 놀랍도록 매혹적이다. 그래서 뭐할래, 라고 물으면 나는 뭐든, 이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 봐서와 뭐든. 묘하게 다른 말들이다. 외롭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보는 수밖에 ..
당신과 라캉 일주일을 고스란히 당신과 보냈어도, 지난 시간을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헝클어진 내 머리 속을 당신 앞에 늘어놓으면 당신은 나를 혐오할까 더 사랑할까.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젓는 상상만으로도 나는 저릿해진다. 결핍은 나의 힘.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은 초현실적인 느낌이다.몇 번이고 글을 써보려 했지만, 우리를 묘사하기엔 상징이 부족하다. 당신과, 당신에 대한 나의 견해와, 당신을 그리는 나의 글은 언제나 조금씩 비껴나 있다. 5cm쯤 어긋난 철길을 미끄러지듯 조사를 고치고 어순을 바꾼다. 그러나 잘못 달린 주석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나는 일부러 체언을 지워 모호한 말을 건넨다. 사랑이란 아름다운 오독의 연속이 아닐까.한동안 일기를 쓰지 않았다. 흘려보내기엔 소중한 날들이다.
<캐롤> 감상평, 하나마나한 이야기 하나마나한 이야기_ 영화 을 봤다. 과연 대단한 분위기의 영화다. 케이트 블란쳇의 눈빛과 태도에 홀려버릴 것 같았다.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세 번 정도 전율이 있었다. 멜로영화에서는 드문 일이다. 특히 시각적으로 황홀한 경험이었다. 전후 뉴욕의 분위기를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은 나의 감상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감상에 대한 불만글에 가깝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에 관한 영화평을 좀 찾아본 게 화근이다. 답답해서 글을 안쓸 수 없었다. 영화평들이 전부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랑 같은 영화를 본 게 맞는지 따져 묻고 싶을 정도다. 예컨대 많은 수의 감상이 “동성애를 제쳐놓고 보면 그저 보편적인 사랑일 뿐이다”라고 적고 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동..
<더 랍스터> 사랑과 인생에 관한 알레고리로 가득한 영화, 를 봤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힐 알레고리들.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도,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로도, 심지어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겠다. 나는 (평범하게도) 사랑에 대한 냉소로 읽었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기껏해야 카드 뒤집기 게임처럼 얼떨결에 짝을 맞춰가는 것. 혹은 모두를(자신을 포함하여) 속여가며 평생을 연기하는 것.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고 서로에게 총질할 수도 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부분이 다르단 걸 확인하는 순간 짜게 식어버리고 마는 것. 서로에게 감정을 강요하며 거대한 사기에 동참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 그럼에도, 사랑이 오고야 마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정작 사랑을 찾을 때엔 없다가, 사랑하면..
힐러리 로댐 그녀는 길고 좁다란 도서관 반대쪽 끝에 서 있었다. 그녀는 한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책을 덮고 긴 도서관 통로를 걸어와서는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계속 날 쳐다보고, 나도 계속 당신을 돌아보고 있으니, 서로 이름쯤은 알아야겠네요. 저는 힐러리 로댐인데요. 당신은요?" - 빌 클린턴, 마이라이프 오늘은 긴 밤산책을 했다. 종암경찰서를 지나 개운산을 빙 두르는 산책길이었다. 산등성이를 타고 조성된 산책길을 걸으니 양 옆으로 도시의 야경이 펼쳐졌다. 탁월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 기분전환으로 걷기에는 충분했다. 앞으로 자주 오게 될 것 같다. 산책길을 걸으면서 서울의 작은 공원들에 대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숲이나 선유도공원처럼 대규모 공원 말고, 산..
붉은색이 어울리는 당신 어두운 글만 쓰고 있기 싫어서 오늘은 당신에 대해 쓰기로 했다. 붉은색이 어울리는 당신. 꽃처럼 활짝 웃는 당신. 작은 이가 오밀조밀한 당신. 가시 돋힌 말에 거리낌 없는 당신.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을 당신. 오늘도 길가에서 혹시 마주칠까 두리번거리게 하는 당신에 대해서. 내가 왜 당신을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쓰자면 끝도 없지만, 당신을 왜 내가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쓸 수 없다. 당신에 대해선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당신은 내게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으므로. 말하자면 나는 붉은색을 좋아하고, 활짝 웃는 입에 가슴이 뛰고, 가시 돋힌 말이 매력적이라 생각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부러워하며, 갑작스러운 산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당신은 내게 취미(taste)의 문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