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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표절 “그에게는 언제나 대인관계가 순탄했으니, 작은 균열도 생소하여 피로감이 컸다.” 지나고 나면 굳이 마음쓸만큼 대단치도 않다. 그렇게 믿고 지냈다. 그런데 비가 많이 왔다. 비가 참 많이 왔고, 비가 많이 또 계속 왔고, 지겹도록 계속 비가 왔다. 비도 참 많이도 오네. 떨어지는 비를 넋놓고 본 날도 있었다. 비가 이렇게 많이 와도 되나. 언제까지 비가 오려나. 이제 비가 그만 그칠 때도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할 즈음에 그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그 후로도 며칠을 비가 그치지 않았다. 칠월이었다. 칠월 들어서 책을 세 권 읽었다. 김애란의 은 아주 좋은 작품과 그저 그런 작품이 섞여있다. 이나 는 김애란다운 분위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결혼 이후의 삶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같은 작품은 더이상 나오지..
<옥자> by 봉준호 옥자 사랑은 보편적이지만, 사랑의 조건은 제각각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랑 이야기는 보편적인 서사를 개별적인 사랑의 조건이 드러나도록 잘 세공해야 한다. 우리는 삶에 관한 진실을 깨닫기 위해 허구의 이야기를 본다. 진실로 믿을만큼 훌륭한 거짓말은 사소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신은 디테일에 있다. 내가 미국인이었더라도 을 최고의 영화로 꼽았을까? 아닐 것이다. 잘 만든 스릴러이긴 하지만, 인생의 영화라고 할 것은 아니다. 에서 내가 조용구(폭력경찰)라는 인물을 가장 좋아하게 된 것을 나의 한국적 배경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조용구라는 인물의 입체성이 좋다. 가끔은 그의 인생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서글퍼진다.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닌 인물에 이렇게 빠져버린 건, 그만큼 디테일이 훌륭한..
인생은 선택의 연속 지난 주에는 진로를 약간 트는 선택을 했다. 나름 의외의 선택일까. 이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로컬한 업무를 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반도 탈출의 길은 더욱 요원하게 되었다. 모순 덩어리의 인간이다. 화려한 성공을 꿈꾸었다가, 스스로의 속물성을 경멸한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아직도 모르겠다. 이제는 핑계도 바닥나고 있다. 그럭저럭 평온한 삶이었는데, 요즘 다시 들뜨고 있다.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기뻤다가 우울했다가 한다. 집착했다가 체념했다가 한다. 꿈꾸다가 꿈깼다가 한다. 생각치도 않게 춤을 추러 가게 되었을 때엔 정말 즐거웠다. 동행이 예뻤던 것 아니냐고 한다면 반만 사실이다. 우리는 정말 각자의 춤을 열심히 추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밖에서 음악에 춤출 때 제일 들뜬다. 집에서 이렇게 ..
꿈에서도 아름다운 우리 동네에 가요. 편한 미소를 지어주세요. 오랜만에 꿈에서 그 사람을 만났다. 자주 같이 갔던 어느 카페였다. 그 사람은 나를 발견하고는 건너편 두 테이블쯤 앞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놀란 듯 나른한 제스쳐였다. 가까이 앉으라는 말 같기도 하고, 옆에 앉지 말라는 말 같기도 했다. 나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 사람의 지시에 따랐다. 순한 양이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다른 생각을 해볼 겨를이 없었다. 예컨대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라든가, 내가 보았던 경멸의 눈 같은 그런 것. 일어나서 물을 많이 마셨다. 요즘엔 잠에서 깨면 자주 목이 마르다. 무리해서 늦잠을 잔 날에는 도리어 몸이 무거워 일어나기 어렵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간만에 친구들과 옛날 이야기를 즐겁게도 떠들었다. 안그래도 이틀 연속으로 술을 ..
『법』,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법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법은 무엇을 지키고자 하고,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교양으로 읽는 법의 세계 이 책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펴내는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중 하나로 법을 소개한다. 원제가 말해주듯 길지 않은 분량 안에 법의 생성부터 법이 다루는 영역, 법철학과 사법제도, 법이 직면한 현대의 과제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어느 때보다 법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이때, 교양으로서 법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 알맞은 ‘법 이야기’를 담았다. 이 책에서는 법을 고정된 실체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의 한복판에 두고 그 배경과 법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묘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법이 무엇인지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왜 역사마다 사회마다 법이 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홍상수, 김민희 밤의 극장에서 혼자 봤다. 홍상수 영화가 맨날 똑같지 뭐, 하는 마음으로 들어가서 또 재밌게 봤다. 홍상수 근작 중에는 가장 좋은 것 같다. 특히 김민희의 연기가 아주아주 좋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쿡쿡 찌른다. 에서도 그랬지만, 김민희는 히스테릭하게 소리지를 때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기이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다. 술냄새 진동하는 단체씬은 여느때나 다름없고, 홍상수 특유의 뜬금포 줌인 기법도 보는 맛이 쏠쏠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특히 좋았던 이유는 드물게도 여-여 케미가 매우 훌륭하기 때문이다. 전작들 중에 이런 적이 있었던가? 그동안 여러 뮤즈가 주인공으로 나왔지만, 대부분 홍상수분신 또는 미니홍상수 또는 홍상수워너비 사이를 뱅뱅 맴돌 뿐이었다. 달리 말하면, 홍상수의 전작에서 주인공은 ..
번역 후기 『법』 - 레이먼드 웍스 지음, 이문원 옮김, 교유서가, 2017.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54644877&orderClick=LAG&Kc= 간만의 여유가 생겨서 번역 후기를 기록해 둔다. 번역은 흥미롭지만 어려운 작업이었다. 즐거운 곤란함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타인의 글을 그저 읽는 것과도, 나의 글을 그저 쓰는 것과도 달랐다. 읽는 동시에 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마치 나의 말인 것처럼 쓴다. 번역자는 어디서부터 얼만큼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도 좋은 것일까. 서로 다른 두 언어를 중개하는 일은 예상만큼 어렵지 않았지만, 의외로 역자에게 적절한 지위를 부여하는 일이 꽤 곤란했..
Idiot 그럴 때 답답해진다. 중언부언할 때. 마음을 표현할 어휘가 부족할 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적절히 언어화할 수 없을 때. 내가 쓴 문장이 전혀 내 마음을 포착하지 못해 불만족스러울 때. 쓰다 지우고, 또 쓰다 지운다. 바보같다. 글을 못쓰는 이유는 책을 안읽기 때문이다. 전에는 언제나 무언가를 읽고 싶어하는 편이었다. 활자중독이라는 말도 들었다. 요즘에는 멍때리는 시간이 많다. 글이 눈에 안들어온다는 말의 의미는 재작년쯤에 처음 알았다. 바보가 되고 있다. 언젠가 친구가 글을 잘 쓰는 방법에 대하여 물었을 때, 결국 표현하려는 내용이 좋다면 글도 좋아진다고 대답했었다. 글이 산만하다면 아직 생각이 정리가 안 된거다. 글이 어렵다면 아직 쉽게 설명할 준비가 안된거다. 주장이 또렷하고 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