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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by 테드 창 Ted Chiang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_테드 창 영화 를 관람한 기세를 몰아 테드 창의 중단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를 읽었다. 안그래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간상”을 두고 친구들과 장광설을 늘어놓은 게 엊그제니, 나름대로 시의적절하고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그러나 테드 창은 갈팡질팡했던 것 같다. 쓰고 싶은 게 너무 많이 떠올라버렸는지도 모른다.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주변적 이야기를 적절히 컷트할 필요가 있었겠지만, 작가는 자신이 떠올린 아이디어 스토리의 ‘아이디어’에 지나치게 몰입해버렸다. 특히 후반부에는 겉잡을 수 없이 사변적인 결론으로 치닫는다. (나는 궁예는 아니지만) 중반까지와 이후의 전개를 보면, 최종 결과물은 테드 창이 애초에 쓰고 싶었던 형태의 소설은 아니게 되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
컨택트 or Arrival (음악은 막스 리히터의 다른 곡으로 와 무관하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아마도 대학교 1학년에 처음 읽었다. 당시에 그 책에 너무나도 큰 감동을 받은 나머지 취향도 잘 모르는 동기의 생일 선물로 사주며 읽을 것을 강요했던 것 같다. (아마도 지금 연극판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옥자...?) 저 소설집에 실린 모든 소설이 다 좋았지만, 특히 세 편 정도를 가장 좋아했다. 표제작이기도 한 , , 그리고 . 오늘 을 보러 가면서, 도대체 테드 창의 소설을 어떻게 영화화할 수 있는지 몹시도 궁금했다. 외계인과 지구인의 첫 조우라는 일견 스펙터클한 표면적 서사와는 달리, 는 언어와 시간에 관한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나로써는 시각화했을 때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지는 둘째치고, 시각화가 가능한지조차 ..
쇼코의 미소 _ 최은영 『쇼코의 미소』를 다시 읽었다. 지난 번에「쇼코의 미소」를 읽고, 오로지 선한 의도로 가득찬 주인공들에 대해서 불평했다. 다시 읽고 나니 마음이 바뀌었다. 그리고 최은영 작가님의 팬이 되기로 했다. 특별히 대단히 좋았던 작품이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무리하지 않는 정도로 재미있었다. 어색하다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으나,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문체가 담담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쇼코의 미소』를 읽고나면 좋은 이야기를 잘 들었다는 만족감이 든다. 일종의 작은 어쿠스틱 콘서트라고 할까. 대단한 실력파라는 느낌이 없어도 저절로 빠져드는 소극장의 아늑함이랄까. 작가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이한 관념이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읽었더라도 작가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
소설과 영화 몇 편 소설과 영화 몇 편 종강 후에 소설과 영화를 여럿 보았다. 2016년에 못다한 문화생활을 막판에 몰아서 하는 건지, 2017년에 못다할 문화생활을 초장에 끝내려는 건지, 여하튼 많이 보았다.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감성이 메마른 사람이 되고 있다. 좀처럼 울지 않고 감동받는 일이 드물다. 웃긴 걸 보면 잘 웃는걸 보면, 그냥 소시오패스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법 공부 탓으로 돌릴 마음은 없지만, 수험생의 조급함이라는 게 시야를 좁게 만드는 것 같기는 하다. 먼저 기대하던 켄 로치 감독의 신작 .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은 하지만 글쎄.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별점 몇점이냐고 묻는 친구의 말에 3.5/5.0점이라고 대답했다. 좋은 영화에 왜 그렇게 낮은 점수를 줬는지 처음에는 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와서 말하..
긴 산책을 했다 긴 산책을 했다. 산책하기엔 좋지 않은 계절이다. 따뜻한 날에는 공기가 좋지 않고, 공기가 좋은 날에는 찬바람이 거세다. 요컨대 양자택일이다. 기관지를 희생해서 따뜻한 날을 즐기거나, 추위에 떨면서 기관지를 지키거나. 어제는 간만에 청명하고도 몹시 추운 날이었으므로, 나는 귀와 코가 빨개지도록 산책을 했다. 성북천을 따라서 정릉천까지 갔다. 어느 쪽에도 볼만한 풍경은 많지 않다. 차가운 공기를 잔뜩 마셨으니 결과적으로 기관지를 지키는 선택이었는지도 의문이다. 계절이 지나는 동안 몇 가지 선택을 했다. 몇 날을 고민했지만, 돌이켜보면 회사를 옮긴 일은 선택의 축에도 들지 못한다. 이상과 성공, 돈과 명예, 사랑과 꿈, 그런 추상적인 것들 사이에서는 무엇을 골라도 실패한 선택이다. 요컨대 양자택일은 아니다...
안간힘 안간힘(명사):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몹시 애쓰는 힘. 안간힘은 명사 '안'과 명사 '간힘'이 결합된 합성어이다. 합성어의 경우 뒤 단어의 첫소리로 오는 'ㄱ, ㄷ, ㅂ, ㅅ, ㅈ'을 된소리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표기상으로는 사이시옷이 없더라도, 관형격 기능을 지니는 사이시옷이 있어야 할(휴지가 성립되는) 합성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립국어원에서는 안간힘의 표준 발음을 [안깐힘]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니, 안간힘의 발음에는 안간힘을 다해야 한다. 나도 그동안 안간힘을 다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온 모리스 Morris from America (2016) 채드 하티건 / Morris from America by Chad Hartigan전주국제영화제JIFF 야외상영작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 온 모리스는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주변인이다. 그리고 자기가 주변인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모리스에게 힙합이 EDM보다 쿨하고, 풋볼이 사커보다 재밌으며, 망할 독일어도 배우고 싶지 않다. 외국인으로서의 어려움과 사춘기적 혼란이 겹쳐 모리스는 외로운 상태다. 그러나 힙합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며 친구를 만들어간다는 뻔한 이야기로 달려가지 않는다. 힙합은 그저 지나가는 작은 에피소드일 뿐, 모리스에게 허들을 넘는 그 결정적 순간은 없다. 연적이 만들어 준 무대에서의 적당히 덜 허접한 프리스타일도 그저 소소한 경험일 뿐이다. 모리스의 아버지도, ..
바덴 바덴 Baden Baden (2016) by 라셸 랑 Rachel Lang, 전주국제영화제JIFF 안나는 보잘 것 없는 청춘이다. 부푼 꿈을 안고 고향 스트라스부르를 떠나 독일에 왔건만 하찮은 일 밖에 맡지 못하고 욕이나 먹고 있다. 하루를 망쳐버리고 나니 수중에는 렌트업체에 반납해야 할 슈퍼카 한대와 파티용 드레스. 안나는 그대로 할머니 댁을 향한다. 할머니만은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품어주리라 생각한 것일까. 편찮은 할머니가 목욕 중에 다쳤다는 소식을 듣자 안나는 욕실을 뜯어고치기로 결심한다. 안나는 21세기를 표류하는 프랑스 여성이다. 짧은 숏컷에 톰보이 스타일을 고집하며 바보 같은 성적 편견에 휘둘리지 않는다. 여성에게 사회는 평등해졌고 성적으로 개방되었으며 누구나 (심지어 국경을 넘어서) 자기가 원하는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