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97) 썸네일형 리스트형 힐러리 로댐 그녀는 길고 좁다란 도서관 반대쪽 끝에 서 있었다. 그녀는 한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책을 덮고 긴 도서관 통로를 걸어와서는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계속 날 쳐다보고, 나도 계속 당신을 돌아보고 있으니, 서로 이름쯤은 알아야겠네요. 저는 힐러리 로댐인데요. 당신은요?" - 빌 클린턴, 마이라이프 오늘은 긴 밤산책을 했다. 종암경찰서를 지나 개운산을 빙 두르는 산책길이었다. 산등성이를 타고 조성된 산책길을 걸으니 양 옆으로 도시의 야경이 펼쳐졌다. 탁월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 기분전환으로 걷기에는 충분했다. 앞으로 자주 오게 될 것 같다. 산책길을 걸으면서 서울의 작은 공원들에 대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숲이나 선유도공원처럼 대규모 공원 말고, 산.. 붉은색이 어울리는 당신 어두운 글만 쓰고 있기 싫어서 오늘은 당신에 대해 쓰기로 했다. 붉은색이 어울리는 당신. 꽃처럼 활짝 웃는 당신. 작은 이가 오밀조밀한 당신. 가시 돋힌 말에 거리낌 없는 당신.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을 당신. 오늘도 길가에서 혹시 마주칠까 두리번거리게 하는 당신에 대해서. 내가 왜 당신을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쓰자면 끝도 없지만, 당신을 왜 내가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쓸 수 없다. 당신에 대해선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당신은 내게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으므로. 말하자면 나는 붉은색을 좋아하고, 활짝 웃는 입에 가슴이 뛰고, 가시 돋힌 말이 매력적이라 생각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부러워하며, 갑작스러운 산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당신은 내게 취미(taste)의 문제이.. 생존을 위한 산책 장례식이 끝날 즈음엔 너무 울어서, 걸어 나갈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용케도 심장이 뛰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헌화를 마치고도 한참을 앉아서 선배의 친구들이, 동료들이, 가족들이, 후배들이(나의 선배들이) 헌화하는 길을 지켜보았다. 선배들은 꺼이꺼이 많이도 울었다. 전에도 종종 봤을법한 우는 얼굴. 적어도 그 때는 서로의 등을 두들겨줄 정도는 되었다. 장례위원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선배 앞에서 부끄러운 존재였다. 그저 유아적 사고밖에. 이름 석자 오직 선배만을 위해서 할 수 있었을 것을, 자신에게 떳떳하지 않다느니, 부끄러운 이름이라느니, 개소리를 변명처럼 지껄여댔다. 고맙다는 편지를 뒤늦게라도 부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때로는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 어제는 땅을 보고 걸었다 어제는 땅을 보고 걸었다. 며칠 전엔 눈이 세차게 왔다. 언제 이렇게 겨울이 됐나 싶을 만큼. 하얗게 눈이 쌓인 석조건물은 아름답게 빛났다. 몇 번을 보아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너무도 일찍 떠나버린 선배를 생각했다. 선배에게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절망이 깊어도 산책길은 아름답다. 무심한 풍경이다. 같은 길을 걷고 또 걷는다. 걷다보면 생각이 떠오르고 또 걷다보면 생각이 사라진다. 삶이 건조해진 후로 강박적으로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산책만이 내 삶의 촉촉한 순간이다. 같은 길을 걸어도 햇살이 다르고, 색감이 다르고, 그림자가 다르고, 온도가 다르다. 다른 온도의 길을 수 십 번 걷다보면 조금은 안심이 된다. 내가 아무리 흔들려도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선배는 바보같은 웃.. 또 한번 시험이 끝나고 오늘 헌법시간에 윤선생님께서 따끔한 말씀을 주셨다. “변호인의 마음으로 공부하라.” 결과에 치중한 수험중심의 공부방법에 대한 우려의 말이었다. 교수님들이 으레 하는 말씀 중 하나로 흘려버릴 수도 있었지만, 요즘 하던 고민과도 맞닿아 있어서 그런지 깊은 공감이 갔다. 특히 법학에 대한 호기심이랄지 열정 같은 것들이 점차 사그러들고 있는 요즘, 새롭게 마음을 다잡아야겠다고 다짐하게 하는 말이었다. 교과서를 읽을 때, 판례를 읽을 때 자꾸 수험적으로만 생각하게 된다. 이런 건 약술시험에 나올만 하지만, 저런 건 사례형으로 낼 수 없지, 제끼자. 뭐 그런 식. 내가 공부하는 것들을 나중에 실무에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내가 이 사례의 변호사라면 어떻게 논리를 구성했을 지 몰입해서 공부하려는 진정성이 부족했.. 서문 읽기를 권함 서문 읽기를 권함. 독서는 고된 일이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글자의 흐름 속에서 정신을 놓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건 고작 눈과 손가락뿐이라지만, 고도의 집중력으로 온몸의 기력을 쏟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잡생각의 수렁에 빠지기 일쑤다. 그렇게 서너 시간 집중해서 책을 읽고 나면 몸 곳곳이 쑤셔온다. 물론 집중해서 읽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게다가 경청할 만하다고 알려진 책들을 찾다보면 어찌나 두껍고 무거운지, 시작하기 전부터 엄두가 안 나는 때도 많다. 마음먹고 책을 읽겠다고 책상에 앉으면 30분도 지나지 않아 목과 허리가 아파오는 것 같다. 결국 침대에 엎드려 읽다가, 다시 누워서 읽다가, 벽에 기대어 읽는 식으로 정신없이 굴러다니게 된다. 책을 편하게 읽는 방법이 없을까. 빔프로.. 심보선_ 식후에 이별하다 식후에 이별하다 / 심보선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 카페에서 그 사람이 떠나간 자리에 가만히 앉아보았다. 잔 속 얼음이 바스락 하고 무너졌다. 창밖으로는 진부한 풍경. 내손으로 찢어놓은 영수증을 조각조각 천천히 손에 모았다. 얼그레이가 차가웠다. 언젠가 약속을 말한 일이 있었다. 나란히 흙길을 걸은 날도 있었다. 모래사장이 펼쳐진다던 수풀길 끝에는 검은 진창 뿐이었지만, 와인이 서늘했으므로 마음에 들었다. 느리게 헤엄치는 잉어도 물을 지겨워하는 날이 올까. 그 날도 여름이었다. 거울못에 비친 뜨거운 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리 밑으로 침을 뱉고 싶었다. 삼류 소설쯤은 될 수도 있겠다. 나는 오랜만에 혼자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마스킹이 철저했다. 검은 화면에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한참을 의자에 파묻혀 있었다. 이전 1 ··· 5 6 7 8 9 10 11 ··· 1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