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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 카렌 암스트롱 붓다에 관한 책을 (계속) 읽고 있다. 민법 공부가 지겨울 때마다 한 챕터씩 읽어나가고 있으니 일종의 취미생활인 셈이다. 공부와 진로의 번뇌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이었지만, 어느새 다소 진지한 독서로 이어지고 있다. 세 번째로 읽은 책은 로,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이 쓴 싯다르타의 전기이다. 이전에 읽은 책들과 달리 싯다르타의 생애에 보다 충실한 편이지만, 풍부한 종교학적 논의를 서술의 기본으로 삼고 있어서 불교의 현대적 이해에도 도움이 된다. 특히 (부당하게) 제도화된 불교의 교리로부터 싯다르타 자신의 가르침을 분리하고, 싯다르타의 생애에 덧씌워진 초현실적 외피를 합리적인 시각에서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눈에 띈다. 예컨대 붓다가야에서의 득도의 밤에 관한 의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니르바나에 ..
이 생에 구원은 없으리 이 생에 구원은 없으리 붓다를 읽어도 하수상하다. 제도화된 종교와는 생각을 섞을 수 없었고, 신앙 없는 불교읽기는 공허했다. 경청할 말은 많았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은 실천적이었으므로, 지적 허기는 채워주지 않았다. 하루하루 날아가버리는 삶을 뿌리내릴 단단한 토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삶을 평가할 척도 내지는 좌표랄까. 하루를 마무리하려 잠자리에 누웠을 때, 내가 오늘 보낸 삶은 어떠했던가, 생각해보게 하는 기준 같은 것 말이다. 이룬 일 하나 없지만 충실한 기분이 드는 날이 있고, 하루종일 치열했어도 형편없이 느껴지는 날도 있다. 그런 막연한 느낌이 있을 뿐 도통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럴 때면 내게도 삶의 방향이나 속도를 설정할 지침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아마도 넓은 의미의 윤리..
간만의 기록 다시, 첫 중간고사가 끝났다. 열심히 하는 것과 마음을 비우는 것은 별문제다. 머리로 이해하면서도 마음은 따르지 못한다. 나는 열심히 하지도, 마음을 비우지도 못한다. 후회하는 것과 나아지는 것 역시 별문제다. 아직은 후회를 놓지도 그렇다고 나아지지도 못한다. 日日新又日新. 내일이면 다시 월요일이다. 과제를 위해 을 읽었다. 좋은 책이다. 법조인을 꿈꾸는 모두에게 읽혀야 한다. 오랜만에 봉은사에 갔다. 비 온 뒤 절에서는 축축한 향이 났다. 알지도 못하는 한자를 떠듬떠듬 읽었다. 곧 부처님 오신 날이다. 몹시도 많은 등불이 몹시도 많은 희망을 처마에 널어두고 있었다. 나도 희망 하나쯤 널어볼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불자도 아닌 주제에 기복만 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선재스님은 食 자제 못하면 法 자제..
근자의 식도락기 토속촌 삼계탕, 딘타이펑, 쟈니스 덤플링, 라셀티끄_ #후라이팬에 다진 마늘을 살살 볶는다. 마늘향이 기름에 충분히 배면 팬 전체에 두르고 얇게 썬 두부를 올린다. 두부가 노릇해질 즈음에 간장을 한술 끼얹는다. 뒤집어가며 두부를 충분히 익힌다. 짭쪼름하면서도 마늘의 풍미가 가득한 두부부침이 간단히 완성! 밥 없이도 포만감을 느끼기에 충분하고 부드럽게 소화도 잘 되니 야식으로는 딱이다. 반 모만 부쳐먹겠다는 생각이었지만, 먹다보니 한 모를 다 헤치우고 만다. 귀가길 마트에 들러 사온 두부가 고작 1300원. 소박하지만 행복한 야식이다. 오늘밤도 배부른 꿈을 꾼다. 꿀꿀. #며칠 전에는 이른바 ‘서울 3대 삼계탕집’ 중 하나라는 토속촌에 갔다. 흔히 신길동 호수삼계탕, 중구 고려삼계탕(강원정을 넣는 수도 있..
<프란시스 하>를 위하여 프란시스 하 (2014) Frances Ha 8.6감독노아 바움바흐출연그레타 거윅, 아담 드라이버, 미키 섬너, 그레이스 검머, 마이클 제겐정보로맨스/멜로 | 미국 | 86 분 | 2014-07-17 글쓴이 평점 “내일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그대는 아닐지도.어쩌면 또 다른 품과 새로운 관계와 언제나의 아픔일지도... ” 프란시스를 위하여_ 처음 자취를 시작한 것은 17살이 된 해 겨울이었다. 학업에 집중한다는 핑계로, 아늑한 집을 놔두고 혼자 방을 얻어 살겠다는 갑작스런 선언을 해버렸다. 흡사 고시공부를 위해 절에 들어가려는 사람과도 같은 비장한 선언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저 마음대로 살고 싶었을 뿐이지만, 부모님은 의외로 흔쾌히 동의해주셨다. 부모님 앞에서 십여년간 진지하고 생각 깊은 아이로 위장해..
여행자의 향기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름이었다. 나는 당시에 몹시도 좋아했던 두 선배, 그리고 그럭저럭 가깝다고 생각하던 한 동기와 함께 홋카이도로 여행을 떠났다. 또래끼리 나선 첫 해외여행이었다. 여행의 일정 계획부터 숙소 예약까지 모두 직접 한 것도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엉성한 계획이었고, 미숙한 탓에 더 싸게 갈 기회를 많이 놓쳤다.) 티벳으로 혼자 배낭여행을 다녀온 게 불과 몇 달 전이었으니, 어쨌든 나는 나름대로 능숙한 여행객의 풍모를 보이고 싶어했다. 여유가 곧 어른스러움이자 남자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꽤나 이상적인 조합이었다. 원어민에 가까운 일본어 실력자가 1명, 서브문화 덕후도 1명. 그리고 누구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실 내가 여행 내내 날카..
망상의 끝 #언젠가는 접어둔 책장 귀퉁이를 책임져야 하는 시간이 온다. 번복할 것이 많아서 장황해지고 마는 그런 나이가 온다. 아무리 오랫동안 책을 눌러두어도 접었던 빗금은 말끔해지지 않는다. 나이테처럼 조밀해지는 빗금들 사이로 무엇을 새롭게 새길 수 있나. 몇 개월만에 다시 펼쳐든 시집에 새롭게 몇 개의 귀퉁이를 접고, 너저분하게도 접혀있던 귀퉁이를 펼친다. 어려 번 읽고 또 읽은 글귀들이 낯선 이가 되어 박힌다. 이제 내가 읽은 시에는 온통 그 뿐이다. 다시는 예전에 읽은 시를 떠올릴 수 없다. 그러니 오늘은 무슨 시를 꾹꾹 눌러써야 하나. 아무리 시를 눌러써도 종이는 더러워지기만 하는데. 짐짓 쾌활하게 웃어본들 나의 귀퉁이는 전락을 일삼는데. #나는 불완전하게 태어났다. 내 팔은 원래 네 개였는데, 실수로 두..
바람의 지문 _ 이은규 바람의 지문 _ 이은규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그사이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인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덮인 책장의 일이란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의 냄새를 맡는 것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보이지 않는 지문 위에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어쩌면 당신의 지문은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