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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보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마주앉아 다른 풍경을 본다. 두 눈이 한 방향을 향하므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보는 수밖에 없다. 그대의 얼굴 너머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나. 시선이 머무는 방향을 불안한 마음으로 짐작해 본다. 그대의 침묵이 길었다. 대답은 유예하는 쪽이 간편했다. 노래가 달콤해도 몸에서 고기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나의 손은 형편없었지만, 그대는 그림을 탓하지 않았다. 내일은 더 잘하겠지.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든 노트를 덮는다. 봐서. 보고. 그런 유예의 말들은 외로우면서도 놀랍도록 매혹적이다. 그래서 뭐할래, 라고 물으면 나는 뭐든, 이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 봐서와 뭐든. 묘하게 다른 말들이다. 외롭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보는 수밖에 ..
당신과 라캉 일주일을 고스란히 당신과 보냈어도, 지난 시간을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헝클어진 내 머리 속을 당신 앞에 늘어놓으면 당신은 나를 혐오할까 더 사랑할까.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젓는 상상만으로도 나는 저릿해진다. 결핍은 나의 힘.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은 초현실적인 느낌이다.몇 번이고 글을 써보려 했지만, 우리를 묘사하기엔 상징이 부족하다. 당신과, 당신에 대한 나의 견해와, 당신을 그리는 나의 글은 언제나 조금씩 비껴나 있다. 5cm쯤 어긋난 철길을 미끄러지듯 조사를 고치고 어순을 바꾼다. 그러나 잘못 달린 주석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나는 일부러 체언을 지워 모호한 말을 건넨다. 사랑이란 아름다운 오독의 연속이 아닐까.한동안 일기를 쓰지 않았다. 흘려보내기엔 소중한 날들이다.
<캐롤> 감상평, 하나마나한 이야기 하나마나한 이야기_ 영화 을 봤다. 과연 대단한 분위기의 영화다. 케이트 블란쳇의 눈빛과 태도에 홀려버릴 것 같았다.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세 번 정도 전율이 있었다. 멜로영화에서는 드문 일이다. 특히 시각적으로 황홀한 경험이었다. 전후 뉴욕의 분위기를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은 나의 감상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감상에 대한 불만글에 가깝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에 관한 영화평을 좀 찾아본 게 화근이다. 답답해서 글을 안쓸 수 없었다. 영화평들이 전부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랑 같은 영화를 본 게 맞는지 따져 묻고 싶을 정도다. 예컨대 많은 수의 감상이 “동성애를 제쳐놓고 보면 그저 보편적인 사랑일 뿐이다”라고 적고 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동..
<더 랍스터> 사랑과 인생에 관한 알레고리로 가득한 영화, 를 봤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힐 알레고리들.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도,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로도, 심지어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겠다. 나는 (평범하게도) 사랑에 대한 냉소로 읽었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기껏해야 카드 뒤집기 게임처럼 얼떨결에 짝을 맞춰가는 것. 혹은 모두를(자신을 포함하여) 속여가며 평생을 연기하는 것.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고 서로에게 총질할 수도 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부분이 다르단 걸 확인하는 순간 짜게 식어버리고 마는 것. 서로에게 감정을 강요하며 거대한 사기에 동참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 그럼에도, 사랑이 오고야 마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정작 사랑을 찾을 때엔 없다가, 사랑하면..
힐러리 로댐 그녀는 길고 좁다란 도서관 반대쪽 끝에 서 있었다. 그녀는 한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책을 덮고 긴 도서관 통로를 걸어와서는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계속 날 쳐다보고, 나도 계속 당신을 돌아보고 있으니, 서로 이름쯤은 알아야겠네요. 저는 힐러리 로댐인데요. 당신은요?" - 빌 클린턴, 마이라이프 오늘은 긴 밤산책을 했다. 종암경찰서를 지나 개운산을 빙 두르는 산책길이었다. 산등성이를 타고 조성된 산책길을 걸으니 양 옆으로 도시의 야경이 펼쳐졌다. 탁월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 기분전환으로 걷기에는 충분했다. 앞으로 자주 오게 될 것 같다. 산책길을 걸으면서 서울의 작은 공원들에 대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숲이나 선유도공원처럼 대규모 공원 말고, 산..
붉은색이 어울리는 당신 어두운 글만 쓰고 있기 싫어서 오늘은 당신에 대해 쓰기로 했다. 붉은색이 어울리는 당신. 꽃처럼 활짝 웃는 당신. 작은 이가 오밀조밀한 당신. 가시 돋힌 말에 거리낌 없는 당신.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을 당신. 오늘도 길가에서 혹시 마주칠까 두리번거리게 하는 당신에 대해서. 내가 왜 당신을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쓰자면 끝도 없지만, 당신을 왜 내가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쓸 수 없다. 당신에 대해선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당신은 내게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으므로. 말하자면 나는 붉은색을 좋아하고, 활짝 웃는 입에 가슴이 뛰고, 가시 돋힌 말이 매력적이라 생각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부러워하며, 갑작스러운 산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당신은 내게 취미(taste)의 문제이..
생존을 위한 산책 장례식이 끝날 즈음엔 너무 울어서, 걸어 나갈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용케도 심장이 뛰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헌화를 마치고도 한참을 앉아서 선배의 친구들이, 동료들이, 가족들이, 후배들이(나의 선배들이) 헌화하는 길을 지켜보았다. 선배들은 꺼이꺼이 많이도 울었다. 전에도 종종 봤을법한 우는 얼굴. 적어도 그 때는 서로의 등을 두들겨줄 정도는 되었다. 장례위원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선배 앞에서 부끄러운 존재였다. 그저 유아적 사고밖에. 이름 석자 오직 선배만을 위해서 할 수 있었을 것을, 자신에게 떳떳하지 않다느니, 부끄러운 이름이라느니, 개소리를 변명처럼 지껄여댔다. 고맙다는 편지를 뒤늦게라도 부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때로는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
어제는 땅을 보고 걸었다 어제는 땅을 보고 걸었다. 며칠 전엔 눈이 세차게 왔다. 언제 이렇게 겨울이 됐나 싶을 만큼. 하얗게 눈이 쌓인 석조건물은 아름답게 빛났다. 몇 번을 보아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너무도 일찍 떠나버린 선배를 생각했다. 선배에게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절망이 깊어도 산책길은 아름답다. 무심한 풍경이다. 같은 길을 걷고 또 걷는다. 걷다보면 생각이 떠오르고 또 걷다보면 생각이 사라진다. 삶이 건조해진 후로 강박적으로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산책만이 내 삶의 촉촉한 순간이다. 같은 길을 걸어도 햇살이 다르고, 색감이 다르고, 그림자가 다르고, 온도가 다르다. 다른 온도의 길을 수 십 번 걷다보면 조금은 안심이 된다. 내가 아무리 흔들려도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선배는 바보같은 웃..